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 산23번지에 가면 조선 중기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의 묘소가 있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였던 류중영의 차남으로 외가인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3살에 대학을 읽을 정도로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글을 배우다 21세 때 형 류운룡과 함께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64년 명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1570년 이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579년 직제학·이조참의·동부승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82년에는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내고 1584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군무를 총괄하는 도체찰사의 직책을 맡았고 이어 영의정에 임명되어 왕의 피난길에 따라갔으나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또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의 재상으로써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란을 대비케 하였고,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적극적으로 구명을 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이순신은 임란 전 그의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서해와 남해안의 바다를 지켜 전쟁의 양상을 바꾸게 하였다. 평생 동지였던 이순신 장군과의 운명은 서로 교차되는 듯 1598년 11월 9일에 이순신 장군이 노량진해전에서 전사하는 날 공교롭게도 유성룡은 파직되어 삭탈관직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두문불출하게 된다.   훗날 선조는 선생에 대한 복권과 더불어 조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집필에 몰두해 임진왜란의 참상과 교훈을 담은 『징비록』을 저술해냈다. 그가 병들어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은 궁중의 의원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했지만 1607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서애집』과 『징비록 懲毖錄』을 비롯하여 여러 서책이 있고 사후에는 안동 호계서원, 병산서원, 의성 빙산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온 지맥이 봉화군의 만리산(791.6m)을 거쳐 영주의 박달산(579.5m)을 일으키고 다시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576m)을 지나 혈장 뒤 현무봉(160m)을 일으켰다. 현무봉에서 남쪽으로 하나의 가지를 뻗어 혈장을 만들었고 묘소는 이 용맥의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혈장 좌우의 청룡·백호는 약간 낮은감이 있으나 두 겹으로 잘 감싸주니 나름 장풍국을 이루고 특히 외 백호 자락은 혈장 우측을 완전히 감싸면서 본 혈장의 안산이 되었다.   수세는 좌선용에 우선수로 합법하고 좌향은 축좌 미향에 파구가 손사(巳)방이니 88향법에서 제일 길하다는 정양향(正養向)이다. 『지리오결』에서는 좌향을 정함에 있어서 정양향을 놓게 되면 귀인녹마상어가(貴人祿馬上御街)라 하여 임금이 하사한 말을 타고 어도를 다닐 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고 또한 정재왕양(丁財兩旺)하고 공명현달(功名顯達)하며 발복이 오래가 88향법 중 최고로 친다고 하였다. 물론 그 당시 조선조에는 88향법이 도입되기 전이나 자연의 생김이 그러하니 좋은 혈처로 판단할 수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