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근동에 있는 재래시장을 찾았다. 김장철을 맞아 김장거리를 사러 온 것이다. 모처럼 여유롭게 이곳저곳 시장 안을 기웃거릴 때다. 노점상을 벌인 어느 할머니께서 힘없는 목소리로 호객 행위를 한다. “ 아주머니, 무, 배추 좀 사가요.” 라는 할머니 외양을 자세히 보니 매우 추레했다. 걸친 옷이 몸보다 더 커서 마치 크나큰 자루 속에 사람이 들어간 듯 헐렁했다. 이 탓에 그분은 바람만 불어도 곧 넘어질 듯한 왜소한 몸집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할머니 말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분 앞에 놓인 채소들을 살펴보았다. 속이 꽉 찬 배추 및 밭에서 갓 뽑은 듯 싱싱해 보이는 채소류가 다수다.   그것을 보노라니 연로한 할머니가 팔고 있는 노점에서 야채를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께 채소 값을 묻자 의외로 비싼 가격을 제시한다. 이왕이면 추운 날씨에 몸을 움츠리고 있는 할머니 물건을 팔아줄 요량이었다. 이런 마음을 알 리 없는 할머니였나 보다. 그는 배추 한포기 당 욕심껏 다른 곳보다 두 배 가까운 값을 매겼다. 예상치 않게 할머니가 높은 가격을 부르자 배추를 고르다 말고 이내 포기 했다.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 들어서다.   발길을 돌릴 때다. 할머니는 필자 등 뒤에 대고, “ 마수인데 웬만하면 팔아주지, 돈도 많아 보이는 여자가 물어만 보고 그냥 가네. 에이! 재수 없어 퉤퉤.” 라며 침까지 배앝는다. 그 언행에 갑자기 입맛이 씁쓸했다. 뿐만 아니라 종전까지 마음을 움직였던 할머니를 향했던 측은지심이 순간 사라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울러 ‘다정도 병’이라는 말까지 떠올랐다. 할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불쾌한 감정만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왠지 모를 실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평소 어르신들은 인생 경륜이 깊어서 세상사를 너그럽고 넉넉한 마음으로 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잖은가. 그날 시장 안에서 노점상을 하는 그 할머니는 물건 값도 비싸게 요구한 것은 물론, 자신 물건을 안 팔아 준다고 손님인 필자에게 침까지 뱉었다. 이는 매우 경박하고 우매한 처신을 한 것이다. 그 날 자신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채소 일부를 필자가 팔아줄 수도 있었다. 그 운을 헛된 욕심 및 그릇된 언행으로 말미암아 할머니는 놓친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 보아 지나친 노욕老慾과 상식을 벗어난 언행은 행하는 사람의 품격마저 떨어트리잖은가. 필자 딴엔 연세 많은 할머니가 차디찬 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채소를 파는 게 못내 안쓰러웠다. 그래 가격을 물어본 후 적당하면 배추 및 무, 쪽파 등을 구입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가격이 다른 곳보다 상상외로 비싸서 선뜻 구매를 안 했을 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내면이 성숙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인생 경험이 부족하여 미완未完의 삶을 꾸리기 예사다. 어디 이뿐인가. 때론 수많은 오류를 비롯 모순도 행한다. 이는 경험 및 사리판단 능력의 결여 탓도 있다. 그러나 나이 들면 그동안 온갖 풍상을 겪었잖은가. 젊은 날과 달리 세상살이 이치와 심오한 사상 및 철학을 갖추게 되어 우스개소리로, 앉아서 천 리 길을 내다보고 만 리 길을 내달릴 수도 있다고 하잖은가. 이런 삶의 경륜은 지혜로 자리하여 남은 생을 이끄는 지침서 역할까지 해준다. 아울러 노년의 삶을 격조 높고 곱게 늙게 하는 비결로 작용케 한다. 즉 인향人香을 짙게 해주잖은가. 겪을수록 풍기는 그 향기에 매료케 하는 게 사람이 지닌 인향人香 아니던가. 늙어서는 인물도, 지닌 재산과 사회적 신분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언행에 덕기德氣가 서려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노년이 지닌 향기이다. 각박한 세태여서 그런지 이 향기조차 좀체 맡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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