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 67-1번지에 가면 조선조에서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권민수(1466~1517)의 묘가 있다. 그는 148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종 25년(1494)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정자를 거쳐 사간원, 병조좌랑이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이조좌랑으로 직언을 하다가 유배를 가게 되고 2년 후 중종반정으로 다시 풀려나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런 후 1516(중종 11)년에는 충청관찰사로 나갔으나 이듬해 1월 관아에서 사망하고 상주 함창의 계좌정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그의 묘갈명에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유명인의 묘소에는 대부분 하나씩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듯이 이 묘소 역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권민수의 묘는 풍수지리상 잉어명당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장삿날 “묘 자리를 점지한 지관이 이 자리는 명당이지만 너무 깊게 파지 말고 묘를 쓰시오” 즉 두 자 이상 깊게 파지 말 것을 후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제 후손들은 광중을 파 내려가다가 흙이 너무 좋아 지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더 깊이 파내려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광중에서 갑자기 잉어가 한 마리 툭 튀어 나오더니 아래쪽 연못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놀란 자손들은 지관의 말을 어긴 것을 후회하며 그 연못의 물을 다 퍼냈으나 잉어를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하관을 한 뒤 봉분을 만들었으며 그 후 이상하게도 후손들은 줄줄이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야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일제강점기 때 묘소 아래 연못을 메웠더니 그 앞쪽의 들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다시 작은 연못을 파고 그 자리에 잉어무덤을 만들어 주니 이듬해부터는 풍년이 들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잉어 묘는 흔적도 없고 묘소 밑에 조그마한 웅덩이만 남아있다.   이곳의 산세는 백두대간의 동쪽에 위치한 소머리산(449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나간 산줄기가 상주시 공검면의 국사봉(338.8m)을 거쳐 이 묘소의 주산인 숭덕산(235.7m)을 일으켰다.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내려와 혈장을 맺었다. 주산에서 길게 뻗어 나온 줄기에는 학슬(鶴膝)이나 봉요(蜂腰)형태의 과협이 필요한데 이렇다 할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과맥으로 길게 행룡하다 마지막에 약간 비룡입수하여 혈을 맺었다. 풍수가에서는 이곳의 혈장을 돌혈, 유혈, 겸혈 등 보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바 이러한 현상은 어느 쪽이든 뚜렷한 특징이 없기 때문이다. 혈장의 뒤에서 비룡입수 하였으니 돌혈로 볼 수도 있고, 양쪽 개각이 있으니 겸혈로 볼 수도 있으며, 당판의 길이와 그 모양으로 볼 때 유혈로도 볼 수 가 있다. 그러나 혈의 사상(四象)에는 그마다의 특징이 있고 이곳 혈장은 그렇지 못하다보니 보는 이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당판의 혈증을 찾아 점혈하여야 하는바 이곳은 혈장 앞의 전순이 분명하기에 그 전순을 기준하여 그 위(안)쪽에 점혈을 하면 된다. 이곳은 혈장주변의 사신사(북현무. 좌청룡, 우백호)가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안산이 멀어 앞쪽이 허한 단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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