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모음곡 중에 ‘키예프의 성문’이란 곡이 있습니다. 무소르그스키와 절친했던 화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요절한 후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그가 남긴 작품으로 연 전시회에서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무소르그스키가 몇 개의 그림에 상상을 더해 작곡한 것이 이 피아노 모음곡이었습니다. 관현악곡으로 편곡된 ‘키예프의 성문’을 들으면 마치 화려 장대하고 당당한 성문을 목전에서 보듯 장중한 느낌을 받습니다. 20세기 초 이 키예프공국의 땅에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공화국이 건설됩니다.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서 자영농들이 많았는데 스탈린이 집권한 이후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에게서 생산물을 거의 수탈하다시피 징발하여 수출하고 그 자산으로 산업을 공업화 하려는 경제정책을 세웁니다. 애써 지은 한 해의 결과물을 탈취하듯 징발하는 데 반발하는 농민들을 스탈린은 반혁명분자로 취급하고 국가의 적으로 명문화하며 오히려 이들에 대한 약탈을 장려하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날씨의 영향으로 소출이 적어진 것을 고려하지 않고 곡물을 징발하여 1932년과 1932년 사이에 ‘홀로도모르’라고 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합니다. 이 기근으로 우크라이나 인구의 거의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기아로 목숨을 잃었는데 전문가들은 이 대기근을 스탈린의 신경제정책이 만든 인재(人災)로 규정합니다. 대기근에 대한 사실을 덮으려고 스탈린은 정부 차원에서 정보를 조작하고 봉쇄하며 모스크바 주재 서방 기자들을 감시하고 통제, 또는 회유를 통해서 이런 사실들이 서방으로 알려질 수 없도록 통제합니다.   이 시기에 게라지 존스라는 영국 저널리스트가 스탈린을 인터뷰를 하려고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모스크바에 머무는 도중 쉬쉬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을 풍문으로 듣고 직접 취재하고자 우크라이나로 갑니다. 적들의 유언비어라던 정부의 말과 달리 거리 곳곳에 아사자의 시체가 방치되고, 먹을 것이 없어 어린 아이들이 나무껍질을 씹는 현실을 보면서 그는 공산주의의 민낯을 체감합니다. 스탈린 정부는 현실을 덮고 포장하기에 급급하고 심지어 취재를 시도하려다가 의문사한 기자가 생길 정도로 언론을 통제하는 가운데 존스는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폭로합니다.   존스의 폭로 기사를 접한 사회주의자 에릭 아서 블레어는 「동물 농장」을 써서 알레고리로 스탈린의 전제주의 독재를 비판합니다. 에릭 블레어의 필명이 조지 오웰입니다. 오웰은 ‘기만이 보편적인 시기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적 행위’라고 말하며 존스의 저널리즘 정신을 지지했습니다. 지배계층인 인간에 대항해서 쫓아내고 동물들만의 낙원을 꿈꾸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던 돼지 나폴레옹도 결국 자신이 지배계층이 되어 옛 체제의 지배계층이 누리던 것을 고스란히 누리며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는 공포정치를 폅니다. 그리고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고 하던 동물 계명을 어느 사이에 ‘네 발은 좋다. 두 발은 더 좋다.’라고 바꾸며 부패해갑니다. 「동물농장」은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고 부패되는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로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회주의를 비판한 것입니다. 요즘 어느 정치인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뜬금없이 언급하고 더 뜬금없게도 그 이야기 속의 암컷 운운하며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말로 설화(舌禍)를 겪고 있는가 봅니다. 특정인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동물, 암컷 따위의 저열한 표현을 쓰는 것은 「동물농장」에서 의도한 오웰의 알레고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더구나 유리 천장을 걷고 여성의 사회활동 폭을 넓히자고 공기업의 임원에 남녀 성비를 어거지로 조율하면서까지 여성의 자리를 만들던 전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사람의 암컷 발언은 여성에 대한 그의 편견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권력이든 시간이 가면서 처음의 철학이 변질되면 부패한 권력이 되는 것을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많이 봐 왔고 오늘날에도 보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고 권력의 맛에 취하면 우리가 민주화를 쟁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특정 집단만의 수고가 아니라 이제는 침묵하는 다수로 돌아간, 당시의 지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망각한 모양입니다. ‘억압과 통제에 대항하여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투쟁하는 민주화 운동’을 한다던 의미의 ‘운동권’이라는 용어가 지금은 어떤 특정 정치 집단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특권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 부패한 특권의식이 여성을 동물의 성별을 지칭하는 단어로 비하해 일컬음으로 자신이 성별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데 일조 하고 있음을 그는 모르는 걸까요?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