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좁은 집이 발칵 뒤집혔다. 시골 친척들이 아예 짐 보퉁이를 짊어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긴 수염에 두루마기를 걸친 아제비뻘부터 날렵한 신사복을 입은 나이 많은 형님에 이르기까지 우리 집은 잔치 때보다 붐볐다. 바로 신라문화제 때문이었다.친척들은 고구마, 사과, 설익은 감을 싸들고 와 우리집 고방(庫房)을 채웠고 자신들이 며칠간 묵으면서 축낼 식량도 미리 두량해서 가져왔다. 아버지는 적지 않은 가족들을 안방에 몰아넣었고 나머지 방들은 손님의 항렬을 잘 배려해 분배했다. 늦은 밤까지 마당의 평상에서는 그동안 미뤄줬던 이야기가 융숭했고 어머니는 손님을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신라문화제는 경주에서 태어나 자란 중년이라면 누구나 최대의 축제로 기억하고 있다. 무열왕이나 김유신 장군을 재현한 퍼레이드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고 선덕여왕, 화랑·원화 행렬을 보면서 신라문화의 꿋꿋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에 젖었다. 각 학교의 밴드부가 앞장서서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하고 뒤따르는 농악대는 한바탕 얼큰한 놀이판을 벌였다. 시청 앞 너른 사거리에서는 동네별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했고, 고등학생들은 차전놀이를 통해 축제의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은 2박3일 열리는 신라문화제 기간 동안 매일 똑같은 프로그램의 가장행렬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에 시청 앞으로 나아가 좋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퍼레이드는 사흘간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화랑·원화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학생은 일약 지역의 스타로 부상했다.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 감동이 사그라졌다. 매체에서는 보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쇼들로 넘쳐났고 언제나 즐길 수 있는 놀이판이 곳곳에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했다. 현대사회에서 과거 신라문화제를 재현해 놓는다면 모두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도대체 이 촌스러운 짓에 왜 우리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허비해야 하느냐고 푸념할 수도 있다.그러나 문화는, 특히 전통과 역사를 가진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아 있거나 문헌에 기록됐거나, 실물이 전해지는 문화의 흔적은 언젠가 다시 꽃을 피운다. 신라문화제는 단순한 지역 축제가 아니다. 전쟁이 끝나고 황량한 삶을 살던 국민들이 가난을 벗기 위해 새롭게 떨치고 일어나던 1962년 처음 열린 신라문화제는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즐거움이었다. 신라문화제는 이처럼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오롯하게 기억돼 있다.그러므로 요즈음 각 자치단체에서 불쑥불쑥 단체장 맘대로 만들어내는 축제와 근본이 다르다. 대중가수들 불러서 요란한 오프닝 공연을 하고, 공터에 천막 쳐놓고 음식판 벌이고, 정체성이 모호한 프로그램들 만들어 예산 짜맞추기 하는 그런 축제와는 급수가 다르다. 정부와 문화부도 이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경주시가 먼저 이 축제의 소중함과 의미를 강조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대표 축제로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적, 재정적 지원을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인류의 역사에 축제는 불가분의 관계다. 축제를 소모성, 낭비성 행사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축제를 통해 공동체 의식이 고양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 부가적 가치를 창출해 낸다. 거기에 신라문화제는 매우 부합되는 축제다. 언제부턴가 소규모로 축소되고 본질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에 대한 반성을 서둘러야 한다. 엉뚱한 프로그램이 등장해 주객이 전도된 현상도 바로잡아야 한다.경주가 신라천년의 고도라는 점만 부각해서는 안 된다. 그 정도로 성에 차지 않는다. 경주는 대한민국 역사와 문화의 원형질이다. 그것을 간과해 소극적이고 위축된 행정을 펼 이유가 없다. 경주는 대한민국 최고의 도시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경주는 중국의 시안과 이탈리아 로마와 버금가는 도시다. 경주를 알리는 가장 좋은 아이템이 신라문화제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세계 유수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축제 전문가와 경주 고유의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줄 지역 인사들이 머리를 맞대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올해 신라문화제는 언제 시작해서 무슨 프로그램이 있었으며 언제 슬그머니 끝나버렸는지 시민 대다수가 모른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