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가을 밤은 서늘해서 등불을 밝히고 책읽기에 좋다하여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말도 있다.
소설가 김동리는 젊은 시절 어떤 책을 읽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기까지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어떤 책이었을까?
그의 독서는 큰형 김범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범부는 열두살 때 사서삼경을 뗀 신동이었으며, 경주가 낳은 천재중 한명으로 꼽는다. 동양철학과 한학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에 모르는 바가 없었다.
화랑정신 계승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박정희정권의 사상적 스승이었고, 그의 저서 '화랑외사'가 교본이 되다시피 했다.
유신독재정권에 관여한 이유로 그의 철학과 사상은 묻혀있는 듯하나 때가 되면 재평가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의 사상이 신라정신과 동학 등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흔 둘에 태어난 막내 동리에게 열 여섯살 위 큰형은 아버지와 같고, 스승같은 존재였다. 동리가 어릴때부터 직·간접적으로 큰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삶 곳곳에 묻어나 있다.
할아버지 젯삿날 그는 서울서 내려온 형에게 물었다. "형님, 할아버지는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던 형 대신 매형이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고 하잖아" 동리가 "그라믄 밤마다 별이 많아지겠네요" 하자 듣고 있던 큰형이 "창봉이도 철학하겠대이" 이말에 가슴이 와들와들 떨리었다고 했다.
문학과 철학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도 큰형의 이 한마디 때문이었다고 어느 책에선가 밝히기도 했다.
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 때 처음 지은 글짓기부터 사건을 일으켰다. 시 '봄비' 의 표현속 '돛대도 없이 배 탄 백의인(白衣人)' 의 백의인이 누구냐며 경주 경찰서 고등계에 호출을 받고 일본인 형사에게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소설 '사반의 십자가'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계성학교를 거쳐 경신학교 시절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과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세익스피어 '햄릿'등의 소설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가정형편상 서울 경신학교를 그만두고 큰형이 있던 부산으로 가 있으면서 방에 가득한 철학서들을 읽기 시작했고 플라톤과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등을 읽던 열 일곱 살때만 하더라도 큰형처럼 철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된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 읽으면서 였다. 인간성의 구체적 형상화와 인간주의를 표현한 이 책은 철학에서 문학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뒤 그는 문학전집을 탐독하며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어느날 '은하' 라는 시를 지어 큰형에게 보여주었다. '물에서 남녀가 태어나던 옛날, 개구리 알은 은하처럼 둥둥 흘러갔거니' 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큰형은 '창봉아 니는 철학보다는 문학쪽이대이' 그러면서 지어 준 이름이 시종(始鐘)이었다.
1934년 조선일보에 시 '백로'가 입선되었을 때는 호적명 창귀를 썼고, 이듬해 '화랑의 후예' 가 당선되었을 때는 시종을, 1836년 동아일보에 '산화' 가 당선되었을 때는 동리를 사용했는데 이후부터 동리로 고정되었다.
동리가 한국문학의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큰형이 이름을 잘 지어준 까닭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다시 경주로 돌아온 뒤 그는 본격적으로 문학쪽으로 독서의 방향을 바꾸었다. 경주역에 근무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철도문고의 책들을 빌려다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문학이란 막연함속에서 다시 소설쪽으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한 작품이었다.
라스꼴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참회길로 인도하며 유배지 까지 따라가서 위로와 사랑을 주는 용기있는 여인 쏘냐에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이 책은 필자도 고교시절 읽고는 며칠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스탕달신드롬을 느꼈을 정도로 멍한 상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동리가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하는 책으로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그리고 동양고전 '역경'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가을은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 동리가 철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을 전환시킨 '파우스트'와 구체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제시한 '죄와 벌'처럼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책 한권이 어딘가에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