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등불은 희망의 상징으로 표현한다. 반면 망자(亡者)의 저승길을 밝히는 역할도 하나보다. 한 치 앞도 예측 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인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게 죽음이기도 하다. 이 때 황급히 상가(喪家) 앞에 내걸리는 게 일명 `발등거리 등불`이다. 이 등불은 필자를 한국문단에 첫발을 내딛게 한 수필 소재로 작용했다.  1995년 연우(煙雨)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밤이었다. 동네 골목에 들어섰을 때 어느 집 앞에 내 걸린 등불을 보았다. 이것이 걸린 집 안에선 곡성(哭聲)이 구슬프게 들려왔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나무 살로 이리저리 얽어 한지로 깁을 만들었다. 처연한 빛을 발하는 이 등불을 바라보자 순간 큰 이모의 죽음이 뇌리를 스쳤다.  이 내용을 쓴 수필이 곧 `발등거리 등불`이다. 이 작품은 인간의 죽음을 주제로 다뤘다. 27년 전,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대하며 그것이 안겨주는 비통함을 헤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수필 특성상 인간 존재 해명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이런 어둡고 무거운 제재를 창작의 모티브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정든 피붙이들이 죽음을 맞이한 탓이다. 아버지는 물론 마치 친딸처럼 아껴주던 큰 이모를 비롯, 유년 시절 어머니한테 꾸중 들을 때마다 치마폭에 몸을 숨겨주던 자애로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또한 30대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어느 날 홀연히 곁을 떠난 남동생이다.  이렇듯 그동안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척을 죽음의 손아귀에 빼앗겼다. 요즘은 빛바랜 사진첩에서나마 그리운 그들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평소 이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에 가슴이 미어진다.  죽음을 논하노라니 어린 날 외가 동네에서 우연히 목격한 장례 행렬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이 때 누런 삼베옷과 두건을 쓴 많은 남정네와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곡을 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당시 상여 머리에서 요란한 요령 소리와 함께 부르는 `향두가`는 어린 마음에도 애간장이 녹는 듯 했다. 특히 "여보시오 사자님네/ 노자돈도 갖고 가오/만단개유(萬端改諭)/애걸한들 어느 사자 들을손가/ 불쌍하다 이내신세 /인간하직 망극하다.(생략)"라는 구슬픈 만가를 들을 땐 절로 눈가가 젖기도 했다.  지금도 그날을 돌이켜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향두가`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먼 장지를 찾아갈 때 종을 흔들며 부르는 게 만가(挽歌)다.  그 때 `향두가`를 들으면서 어른들은 죽은 사람의 저승길 가는 노자까지 걱정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한편 어린 마음에도`목숨을 잃은 후 아무리 저세상 가기 위한 노자를 두둑하게 챙겨간들 무슨 소용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 만가처럼 죽은 사람 노자까지 챙겨주는 정 많은 우리였다. 이로보아 우린 죽은 사람과 산사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고 느끼는 민족인가 보다.   이규태가 쓴 `한국인의 영혼 관`이라는 글만 살펴봐도 그렇다. 이 글에 등장하는 만가의 경우를 살펴보면, "북망산 멀다더니/ 냇물 건너 북망산이로다"를 언급하며 그는 이승과 저승을 냇물 하나로 접근시키고 있다고 언술했다. "한국 사람은 죽어서도 산다" 라는 헐버트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긴 이 말에도 일리는 있다.  유년 시절 외증조할머니께서 구순(九旬)을 훨씬 넘기고 이승을 떠났다. 장수 하였음에도 외가 마루 한 구석에 증조할머니 제청을 모셨다. 나무로 만든 높은 상 앞을 흰 무명천으로 가린 제청이었다.  조석(朝夕)으로 외할머니는 이곳에 향을 피우고 놋주발에 흰쌀밥을 가득 담아 국, 과일 등과 함께 정성껏 올리곤 했다. 이런 상식上食은 탈상 때까지 이뤄졌다. 현대엔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영웅호걸은 물론 막대한 권력과 부를 움켜쥔 자도 저승길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이태원 핼러윈 데이 압사 참사는 사정이 다르다. 한창 미래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수많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무참히 희생됐잖은가. 이 사실이 더욱 온 국민을 충격과 슬픔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필자 같은 경우 이 뉴스가 텔레비전에 비쳐질 때마다 차마 두 눈 뜨고 바라볼 수 없을만큼 마음이 참담했다. 이태원 동네 좁은 골목에 한꺼번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로 인해 병목 현상이 빚은 죽음이어서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시금 그들의 영전 앞에 고개 숙여 마음을 다하여 명복을 빈다. 비록 그들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복사꽃 같은 아름다움과 풋풋한 젊음을 지닌 모습은 우리 가슴에 영원히 아로새겨져 좀체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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