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비가 내렸다. 까치가 감나무에 앉아 봄이 오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고, 신은 매년 어김없이 매화와 산수유를 피운다고, 그것이 만물을 창조한 신의 섭리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거실 창에는 봄은커녕 겨울 고드름 같은 딱딱하고 차가운 적막이 흐르고 있다. 그녀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듯 어둑하고 흐린 하늘에 지난 생의 시간들이 펼쳐졌다. 장장 팔십 년의 세월이었다. 이 긴 시간 동안 무엇을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는지, 앞으로 무엇을 위해 또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느 한순간도 기뻐하며 살았던 적이 없었다. 늘 우울하고 슬픈 감정에 함몰되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어쩌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를 더욱 처절하게 갈망했는지 모른다. 그녀가 의미하는 작은 기쁨이란 행복감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를테면 거실 한쪽 끝에 마련한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읽고 쓰고 있는,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남편이 자신을 힐끗 쳐다보고, 뭐 해? 하고 물어주는 찰나의 관심 같은 것에 불과했다. 반백년을 부부가 함께 살아가다 보면 서로 등을 긁어주는 친밀한 사이가 된다고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제 노파가 되었지만 아직도 소녀처럼 사랑을 꿈꾸며 남편에게 따스한 시선을 받고 싶어 했고 다정한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할수록 상처는 커져만 갔다.  그에게 그녀는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공기와 물 같은 존재였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자기 내면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어찌나 차갑고 완강하게 닫혀있는지 안간힘을 써도 열 수 없었던 어느 날 그녀는 그가 읽고 있는 책들을 뒤적여 보았다. `장단기 투자의 비밀`,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영어 실전 토익 어쩌고 저쩌고, 무슨 관리사 자격기출문제, 등등.  그 나이에 투자한 주식이 오랜 잠을 자고 있고, 앞으로의 생계가 불안해지는 상황이었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늘 공부를 하는 그가 한편으로는 대단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잠깐이었다. 그건 아니지.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자라목을 하고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노인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그녀는 노인이 추구하는 세계가 하잘 것 없는 속된 것이며 이제는 사용할 곳이 없는 죽은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은 욕망,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끝없이 돋아나는 검버섯 같은 것이었다. 그런 열정으로 사회봉사나 재능 기부라도 하면 좀 좋아. 그에게 시간은 영원한 것 같다. 우리나라 대표적 전래동요인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 나오는 `천년만년 살고지고`의 염원을 갖고 있다. 자신과 남편의 연수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매일 확인하는 그녀로서는 그의 염원과 욕망이 천박하게 여겨진다. 소망에 대한 애착을 감히 누가 비천하다 할 수 있을까마는 그녀는 그가 더 영원한 세계에 눈뜨기를 바랐다.  그는 며칠 전부터 굳은 얼굴로 거실을 빙빙 돌아다니다가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보곤 했다.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키다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움켜쥐기도 했다. 그녀는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모양이지.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는 숨죽여 컥컥 울었다. 조금 후 괴성을 지르며 통곡했다.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마음을 가다듬고 물었다.  "왜 그래? 혹시, 주식이?"  물어주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그녀의 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당신이 그렇게 말렸는데, 흐흑, 아…"  연금을 포기하고 탄 퇴직금이 몽땅 사라졌던 것이다.  "다 끝났어! 나는 망하고 말았어!"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고집 세고 자만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그가 엄마를 잃은 미아로 변했다. 여태 품어왔던 그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면서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이 엄습했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분노와 증오감을 몰아낼 수 있다니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진심어린 위로의 말이 흘러나왔다.  "울지 마, 살아있으면 되는 거야"  그러나 살아있기만 해서 되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살아내느냐의 조건이 필요했다.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지고`는 불가능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 있었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버렸고 철저히 망해버렸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하던 그녀는 새로운 인식의 눈을 떴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아야만 할 존재였다. 절대자 앞에 우리 인간은 미물이며 연약하고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성경에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이같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녀는 그를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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