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잠잠하던 지병이 슬그머니 또 준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젠 오래 된 벗처럼 덤덤히 여기려 해도, 몸이 주저앉으면 생각처럼 병에 대해 처연해지지가 않습니다. 식물 키우기가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기에 베란다에 화분 몇을 두고 기릅니다. 요즘 들어 반려동물만이 아니라 반려식물이라는 말도 낯설지 않은 걸 보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 더러 있나 봅니다.  며칠 전 키가 자그마한 동백이 드디어 꽃을 피웠습니다. 새빨간 꽃잎에 노란 꽃술이 화려한 꽃 두 송이가 사람 마음을 이렇게나 기쁘게 합니다. 꽃맹아리가 달린 지는 벌써 두어 달도 넘었지만 무뚝뚝한 연인의 마음처럼 좀처럼 열리지 않는 봉오리가 애를 닳고 닳게 하더니, 며칠 전 드디어 주름진 빨간 공단같은 꽃잎이 열렸습니다.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개화는 더 반갑고 기쁩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아기가 이 세상에 나오기 위한 열 달의 기다림, 엄마 아빠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어른이 빨리 되기를 기다리는 사춘기 소년의 기다림, 연인을 만나기 위한 가슴 설레는 기다림, 그리고 인생의 끝에서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다림이 아니더라도 긴 줄에서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 전화를 걸고 상대방이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짧은 기다림, 고된 일상에서 직장인들이 기다리는 주말, 학교나 취업의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조바심 등, 삶의 어디에서나 기다림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득 이 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기다리지 않아도 너는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이성부 시인의 시 `봄`의 첫머리입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필연적인 순환에 따라 와야 할 것은 때 맞춰 올 것이고, 기다림조차 가지지 못할 절망에 허우적대더라도 언젠가는 절망도 바닥을 치고 거기서 벗어날 날이 있다고 읽힙니다. 다만 바라는 순간을 조바심 내며 기다리다 지쳐서 포기해버리지만 않는다면 기다림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고도가 언제 올 것이라는 약속도 없이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포기하고 입으로는 그만 떠나버리자고 말하지만 둘은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내일 고도를 만나러 와야 한다고 서로에게 상기시킵니다. 이렇게 삶은 무의미한 기다림을 떠날 수 없는 부조리극이라고 말하는 걸까요? 어떤 무엇이 올지도 모를 내일을 우리는 매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에는 참 많은 감정이 스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 설레임, 안타까움, 희망, 기대…. 그러나 약속되지 않은 막연한 기다림은 얼마나 애를 태웁니까? 오죽하면 `학수고대(鶴首苦待)`라고도,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고도 할까요? 가슴 설레며 행복한 순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현실이 그만큼 힘들기에 그것을 타개해 줄 새로운 국면을 기다리는 절망적인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든 기다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기다림을 멈춘다는 것은 호흡을 멈추는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니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동백꽃의 개화를 기다린 나의 시간이 고작 몇 달뿐이었던 건 아닙니다. 겨울날 지나던 길가 화원에서 화려한 빨간 꽃송이가 눈길을 끌던 작은 키의 동백이 마음에 확 들어와 가져 왔지만 내 기대가 허무하게 그 겨울 이후 한 번도 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꽃을 피우기에 필요한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았던가 봅니다.  이번 겨울에 들면서 이렇게 해도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으면 베란다에서 치워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식물 영양제도 주고, 화분을 좀 더 큰 것으로 바꾸며 흙도 보충해주었습니다. 물도 전보다 자주 주며 매일 한 번씩 잎을 닦아 주기도 한 끝에 드디어 꽃맹아리가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7년 만에 꽃이 피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시간이 가면 으레 꽃이 피려니 하며 기다린 나의 기다림은 진짜 기다림이 아니었던 거지요. 참으로 기다린다는 일은 간절한 마음과 기다림의 행동이 동반되어야 하는 걸 모르는 어리석은 기다림이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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