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身言書判에 글씨도 포함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는 글씨를 통하여 인간 됨됨이도 짐작할 수 있어서인가보다. 하긴 글씨체가 힘 있고 호기로우면 성향도 호방하다고나 할까. 이 정도 필체는 아니지만 글씨체 때문에 오해를 받은 경우가 있다. 학창 시절 모 잡지를 통하여 펜팔을 하였다. 당시엔 요즘처럼 집집마다 전화도 흔치 않았다. 스마트폰은 더구나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어느 시골 소읍小邑에 사는 여고생과 독서 및 글 쓰는 취미가 서로 맞아 펜팔을 맺었다. 처음 몇 번은 편지를 보내면 머잖은 시일 안에 꼭 답장을 보내주던 그 애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 달이 지나도 두 달이 가까워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훗날 안 일이지만 그 애가 무심했던 게 아니었다. 남성적인 필적이 원인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마음 자락은 무척 옹색한데 필체는 행 간격이 규칙적이며 크기가 일정하고 활달하다. 편지 겉봉에 쓰인 이런 글씨 덕분(?)에 그 애 부모님 눈에 남학생에게서 온 연애편지로 비쳤나 보다. 더구나 이름까지 남학생 비슷하잖은가. 당시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경숙, 명순, 순희, 영희, 미자, 등의 작명이 유행이었다. 이런 이름과 달리 필자 아버진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식植자 돌림을 따라 형제들 이름을 지었다. 이 때문에 ‘혜식惠植’이라는 이름을 부모님으로부터 얻게 된 것이다. 반면 그 아이 이름은 용순이다.   글씨를 논하노라니 문득 안중근 의사가 떠오른다. 지난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10년 3월 25일 정오, 중국 뤼순 감옥 3동 9호의 문이 열렸다. 이곳에 수감됐던 안중근 의사다. 천주교 신자였던 그였다. 자신에게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자 안중근 의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3월 25일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날 마지막 길에 공근, 정근 두 아우가 면회를 왔다. 그는 두 아우에게, “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면 나의 뼈를 고국에 묻어 달라.” 라는 유언을 했다. 또한, “ 만약 시베리아에 가면 내가 단지斷指 동맹 때 자른 손가락을 돌려받아라.” 라는 당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 사형은 3월 26일 치렀다. 3월 25일은 대한제국 순종 황제 생일이었다. 이 날 사형을 치루면 자칫 한국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일제 계산 때문이었다. 이에 사형 집행을 일제가 다음날로 늦춘 것이다.   이 때 하얼빈 의거 감행 시 그를 호송한 어느 일본인 간수가 있었다. 이 간수는 안중근 의사에게 마지막으로 글씨 한 점을 부탁했다. 이 말을 들은 안중근 의사는 형장으로 떠나기 전 하얀 한복을 입고 좌정한 채 붓을 들어 단숨에 글을 써내려갔다. 곧 그 글씨는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었다. 이 글씨 외에도 143일 동안 뤼순 감옥에 갇혔던 그는 200점이 넘는 유묵遺墨을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   안중근 의사 글씨는 한눈에 봐도 웅건, 장중하다. 이에 매료 되어서인지 일본인 검사 · 의사 · 간수 등이 앞 다퉈 글씨를 받으려고 애썼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무엇보다 이들은 안중근 의사의 꿋꿋한 기개와 대쪽 같은 인품에 감화돼서라고 한다.   안중근 의사의 필체는 흡사 큰 바위 위에 올라 굵은 발톱으로 굳건하게 서있는 수사자의 서릿발 같은 기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 글씨는 겉으론 호기로운 듯 보이나 내면엔 남모르는 불안감이 서려있다고 구본진 법무 연수원 교수의 저서, 『필적은 말 한다』에서 밝히고 있다. 심지어 구본진 교수는, “글씨는 뇌의 지문”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글씨만 보고도 항일투사인지 친일파 인지도 알 수 있다고 했다. 항일 투사 글씨는 정사각형으로 반듯하며 힘찬 것이 많단다. 행 간격이 넓고 규칙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친일파 글씨체는 길고 유연하지만 행 간격이 좁고 불규칙하단다. 이로보아 필적만으로도 상대방의 인품을 가늠할 수 있으니 ‘글씨는 곧 글쓴이’라는 말이 맞는 성 싶다.   언젠가 안중근 의사의 글씨 한 점에 수억 원을 호가한다는 소식을 접한 적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정신이 오롯이 배인 글씨를 어찌 한낱 속되게 물질로 계산 할 수 있으랴.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한 인간에 대한 높은 존경심이 아닐까 한다. 이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다. 요즘은 안타깝게도 육필을 찾아볼 수조차 없다. 컴퓨터 자판기로 쓰거나 아님 스마트폰에 의한 문자가 주류를 이루는 시대여서인가 보다. 이젠 글씨를 통하여 상대방의 됨됨이를 쉽사리 엿볼 수 없는 세상에 이르렀다.   이런 연유로 편리함만 좇아 기계 필체筆體를 쓰느라 ‘뇌의 지문指紋’이라 할 육필의 글이 점차 주위에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갑자기 그리운 이에게 백지 위에 펜으로 정성껏 편지라도 쓰고 싶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