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해 전에 인근 야산을 트래킹하다가 인적 드문 어느 산길 옆 산소 주변을 덮은 귀한 야생 은방울꽃 군락을 발견했습니다. 넓은 초록이파리 사이로 내민 하얀 은방울꽃들이 투명한 종소리를 내는 환청이 들릴 만큼 놀라운 아름다움이었지요. 아무에게도 알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야생화 사진을 찍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물론 이곳에 대한 정보는 너 혼자만 알고 절대 다른 사진가에게 알리지 않는다는 약속을 굳게 받고서야 친구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아직 굳건히 번성하는 은방울꽃 무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떡갈나무 숲 속에 / 졸졸졸 흐르는 / 아무도 모르는 샘물이길래 / 아무도 모르라고/ 도로 덮고 내려오지요 // 나 혼자 마시곤 / 아무도 모르라고 / 도로 덮고 내려오는 / 이 기쁨이여-김동환 시, 임원식 곡 ‘아무도 모르라고’ 부분 위의 시는 좋아하는 한국가곡의 가사 일부입니다. 사람에게는 귀한 것을 공개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하며 때때로 남몰래 꺼내어 즐기고픈 마음이 있는가봅니다. 강동면 왕신리에 조선 후기에 창건된 운곡서원이 있습니다. 정조 때 지방 유림인 권행의 공적을 기리려고 지어졌다가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한 기관 역할을 했다는 곳입니다. 경주에서 포항 방면으로 지방도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지방문화재로 보존이 잘된 서원 건물이 단아하게 자리하고 여름이면 주변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도 시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서원 오른편 터에 서 있는 수령이 350년 된다는 은행나무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오래 전 그곳이 사람들에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던 때, 은행나무 앞에 오래되고 작은 흙집이 운곡산방이라는 이름으로 찻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가을이 깊으면 두어 명의 벗들과 찻집의 나지막한 천장이 있는 구들방에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환하게 물든 은행나무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곤 했습니다. 가끔 구들방 아궁이에 서원 뒤에서 주운 삭정이로 주인 대신 군불을 때며 내다보면 바람결에 노오란 보석들이 우수수 떨어져 깔리는 그 모습이 눈물이 나도록 좋았습니다. 인적 드문 고요한 마당의 은행나무 밑에 차곡차곡 내려 쌓인 노란 잎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눈부신 카펫을 포근히 깔아놓았습니다.   한 사오 년 전쯤이던가, 정말 오랜만에 가을 운곡서원을 찾았습니다. 이삼십 년 전보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도 정비가 잘 되었고, 그때는 좀 허름하고 버려진 느낌이었던 서원 건물도 잘 관리되어 말끔해졌더군요. 곧 무너질 것 같던 흙집 대신에 운곡산방이라는 산뜻한 간판을 건 새 찻집도 생겼습니다. 가을이면 운곡서원 은행나무가 장하다는 말이 사람들 입소문으로 이리저리 알려져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말을 귀동냥으로 듣고는 있었지만 그해의 그곳은 내 마음 속에 늘 품고 있던 풍경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온 많은 사진예술가들이 멋진 사진을 위한 적절한 구도를 찾느라고 번잡하고 혼돈스러운데다 여기저기 아예 카메라를 지지대에 고정시켜 놓고 붙박이로 자리를 차지한 이들, 그 사이 둘만의 사진을 찍으려고 온 듯한 연인들이 웬만한 관광지만큼 부산스럽더군요. 나무를 둘러싸고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멀찍이 서서 은행나무 뒤로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다 돌아왔습니다. 발밑에는 사람들의 발길에 더럽혀지고 찢겨진 은행잎들이 여기저기 지친 패잔병들처럼 누워 있을 뿐. 그날 이후 마음속 고향 하나를 잃었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을 독점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떡갈나무 숲 속의 샘물도 한 사람이 이기심으로 그것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면 필경 다치고 말 맑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의 속성을 오래 지키고 싶은 마음이라고 봅니다. 어떤 야생화의 군락지가 사람들에게 새로 알려지고 나서 한두 해 뒤에 가면 그 아름다운 야생화 군락이 사라져 버린다는 말을 왕왕 듣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해도 더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적절한 포커스를 잡으려는 사진동호회나 사진작가들이 몰려들면 그곳은 더 이상 그 야생화들이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기에 적절한 아늑한 장소가 아니게 됩니다.    포항의 쇠제비갈매기 서식지가 알려지자 생태사진작가나 동물애호가들이 자주 찾게 되면서 결국 쇠제비갈매기들은 다른 곳으로 서식지를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특히 솜털이 난 새끼들을 사진 찍으려는 욕심에 둥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새끼의 다리를 묶어두거나 둥지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는 등 갈매기 어미와 새끼가 위협을 느낄 행동으로 손가락질 받기도 했습니다. 꽃이든 새든 나무든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기보다는 목적을 위한 피사체로만 대하기에 그런 결과를 초래합니다.   운곡서원의 은행나무를 찍으러 오는 이들도 나무를 사랑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려 하겠지요. 그렇지만 저리도 웅성대는 곳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서원의 고즈넉하고 고요한 풍경 안에서라야 은행나무의 황금빛 가을이 더 아름답게 빛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사랑하는 것을 더 오래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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