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란 안부나 소식 그리고 용무를 적어 보내는 글을 말하지만, 애정과 진실, 믿음이 담긴 편지는 곧 사랑이요, 마음이요, 거울이다. 몇 년 전 봄날, 텔레비전 뉴스와 일간지에 믿기조차 어려운 화제 거리가 소개되어 전국에 소문의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진원지는 경상북도 안동지방의 어느 유가(儒家)의 집안에 택지조성을 하기 위해서 오래된 분묘를 이장하던 중 4백년이 넘는 조선시대 남자의 미라와 편지 한 통이 발견된 것이다. 첫머리에 ‘원이 아버지에게’로 시작된 이 편지는 죽은 사람의 아내가 쓴 것으로 추정이 되어 더욱 가슴 아픈 사연으로 여겨졌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남편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으나 작은 종이에 더 이상 쓸 자리가 없어 종이를 옆으로 돌려 여백을 채웠다. 당신은 언제나 저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살다가 함께 죽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저와 어린아이는 이제 누구 말을 듣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잃어버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살아갈 수가 없어 빨리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어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은 이승에서는 잊을 수가 없어요. 이 서러운 마음을 어찌 할까요? 이내 편지를 보시고 제 꿈에 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요?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언제 우리는 가시 만날 수 있는지요,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셨지요?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꿈에서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몰래 오셔서 보여 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습니다. 당시 원이 아버지 이응태는 기골이 장대하고 머리가 좋아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귀인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응태가 소화꽃 때문에 죽을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천하의 박색(薄色-못생긴 얼굴) 여인과 결혼해야만 제 명(命)을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날로 집에 심어져 있던 소화나무를 모두 베어 내었다. 한편 원이 엄마 ‘여늬’는 어릴 적 죽을 고비를 넘긴 후, 하늘이 정한 운명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성질 고약한 박색이란 소문을 내며 여덟 살 이후로 바깥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행복하기만 했던 두 사람, 그러나 소화꽃 만발한 어느 해 여름날 원이 아버지는 눈을 감는다. 저 세상에서 남편과의 재회를 믿는 ‘여늬’는 남편이 소화꽃을 보고 자신을 찾아왔듯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럴 것이라며 자신의 무덤에 소화꽃을 심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소화를 ‘능소화’로 바꾸어 부른다. 하늘의 뜻을 능히 이기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이 두사람의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부재를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사랑의 원형이 무엇인지 보여 주며, 깊은 감명을 남겨준다. 사랑은 이유 없이 아끼지 않고 전부를 다 주어도 부족하여 걱정하는 것이라 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사랑이 ‘능소화’로 다시 태어났나보다. 햇살 따가운 여름날, 담 너머로 고개를 다소곳이 내밀고 연붉은 꽃송이로 활짝 핀 모습의 능소화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다. 조용히 피었다가 시들지 않고 송이째 떨어지는 최후의 모습이 퍽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연하게 붉은 능소화는 어여쁜 여인이 꽃이 되어 님을 기다리며 담장 밖을 굽어본다는 애절한 전설이 담겨있는 꽃이다. 400년 전 미라와 함께 발견된 죽은 남편을 그리는 한 통의 한 맺힌 주인공의 편지는 다른 부장품이 다 훼손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변질되지 않고 그 간절한 사연이 전해지게 되었는지 신비롭기만 하다. 아마 원이 어미가 남편을 그리는 망부석 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라로 발견된 인물(원이 아버지) 이응태가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해는 1586년 병술년이라고 한다.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 하셨지요? 우리함께 죽어 몸이 썩더라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드립니다. 당신, 제 꿈에 오셔서 우리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세요. 어디에 계신지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당신,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것인지요.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제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아무도 몰래 오셔서 그렇게 보고 싶은 모습, 꿈에서나 보여주세요. 죽은 남편 이응태는 키도 훤칠하고 기골이 남자다워 외모나 학문에는 뛰어났지만 어느 스님의 예언을 믿고 박복한 앞날을 피하기 위해서는 박색한 아내를 맞이해야한다는 사주에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비록 이응태와 홍여늬 부부는 6년이란 짧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이응태는 능소화로 흐드러지게 피는 여름날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흙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죽은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관속에 고이 끼워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사랑의 연속이 오늘 날의 우리를 감동시킨다. 박색의 여인이 아닌 예쁘고, 참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미색의 부인을 맞은 이응태는 사주팔자가 맞지 않아 죽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겠는가? 능소화 곱게 피던 날 만나, 능소화 만발한 여름날 두 사람의 서럽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통해 잊을 수도 없고, 이기지도 못할 이별의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피처럼 흐른다. 하늘이 정한 운명을 거스르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모진 울림은 전해주고 있다. 손경호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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