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내리던 장마비가 잠시 소강으로 접어들면서 먹구름 속에서 제 삶을 죽이던 태양이 습기를 머금은 채 이내 도시를 달구기 시작한다. 소서를 지나 초복이 문턱이지만 흐린 날씨가 계속되면서 더위에 둔감해 있는 우리들에게 그동안 품었던 열기를 제철소의 고로 주위처럼 한껏 쏟아댄다. 조그만 더위는 참을성도 기를 겸 아이들의 채근도 만류했지만 오늘은 내가 슬그머니 베란다 옆 창고로 가서는 고이 모셔둔 선풍기를 꺼내어서는 묵은 먼지를 닦기 시작했다. 1981년 7월이라는 연도가 표식된 오래된 선풍기. 그 시대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러하셨지만 우리 양어머니는 아주 검소하신 분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시오리 가량 떨어진 현곡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들르는 나에게, 대문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듯이 같이 시내에 나갔다 오자신다. 영문을 모르고 따라나선 나는 동구밖을 나서면서야 그동안 벼르던 선풍기를 사러 가신다는 것을 알았다. 땀을 뻘뻘 흘리시며 콩밭을 매고 돌아오셔서는 된장이나 푸성귀로 잠시 끼니를 드시고 더운 바람 통하는 뒤안 돌에 앉아서 부채 부치시는 것이 어머니의 유일한 더위를 피하시는 방법으로 알고있는 나에게 가전제품인 선풍기를 사러 가신다는 말에 "뭐라 카노?" 라는 말 한마디로 시오리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기만 했다. 달려드는 햇빛과 열기를 손가리개로 연신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모 전파사에 다다랐다. 금성사에서 나오는 선풍기가 좋다고 말을 했는데 어머니는 고개만 잠시 내게로 돌리시더니 전에 동네 아주머니랑 같이 갔었던지 이내 모 전파사에 도착해서는 정 중앙에 진열된 선풍기를 가리키시더니 흥정을 시작했다. 주인 아저씨도 베옷 차림의 어머니를 잠시 보시더만 이내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고는 어머니도 흔쾌히 치마속 주머니를 열어서는 셈을 하셨다. 시내 나온 김에 밥먹고 가자고 해서는 중국집에 가서는 우동 두그릇을 시켰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우동을 드실 줄 아는지 생각도 안해봤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같이 맛있게 먹고는 하루에 네 번 있는 버스를 탔다. 박스 째로 동여 매어진 선풍기를 들라고 하기에도 머리에 이고 가시기에도 힘드셨던지 버스를 선택하셨다. 버스를 타자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농반 진반으로 난리들이시다. 하구댁이 버스 탄 것도 신기했지만 커다란 선풍기 박스까지 차에 태웠으니. 하마터면 우동 먹은 것 까지 자랑할 뻔 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터벅머리인 나에게도 이 날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동구안으로 들어오는데, 갈 때 들리던 매미소리는 한마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선풍기만 빨리 틀어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시원했다. 열대 오지 아프리카의 얼음 한조각이 이보다 나을까. 담주가 되어서 집에 들렀는데 선풍기에 낯익은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어머니께 고장났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안 더워서 그냥 먼지 안들어가게 씌워 놓으셨단다. 그 다음주도 마찬가지고 이듬해도 그 이듬해도 마찬가지셨다. 대문을 들어설 때면 까만 교모에 땀을 척척 흘리며 들어오는 양아들이 안쓰러우셔서 콩을 내다 팔아서는 선풍기를 사셨던 것이다. 정작 콩밭매는 어머니는 전기세가 아까워서 뒤안 돌에 앉아서 부채를 부치신 채로. 오늘 30년 다 되어가는 그 선풍기를 창고에서 다시 모셔와서는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서 1단으로 맞춰 놓고 옛 어머니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국제유가가 하루가 다르게 상한가를 치며 배럴당 150달러를 눈 앞에 두고 있다는 보도가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개발국 중국의 영향이다, 사재기다 라는 말이 많지만 언젠가 인류에게 고갈될 화석연료임에는 틀림없으리. 여름의 문턱에서 깨끗하게 낡은 어머니의 선풍기를 닦으면서 베옷차림과 머리에 쓰신 수건 하나로 한낮의 햇빛을 가리우며 잡초를 매어나가시던 어머니를 콩밭골에서 다시 찾아본다. 순결하고 고결하신 어머니를! 81 경주고졸 87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졸 99문예사조 등단 한국시사랑 협회원 한국 문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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