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시골 장터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장터 한 모퉁이에 매여 있던 황소의 커다란 눈망울, 끝도 없이 이어지던 흥정의 목소리, 그 씨글뻐적한 장터의 그리움이 향수를 느끼게 한다 장터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이며 따라서 장날은 자연스레 인근 마을 사람들의 축제날이 되곤한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장터에 나가게 되고, 장터에서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과 잡담을 나누곤했다. 장날을 통해서 혼사가 이뤄지고, 또 장터에서 모의가 이뤄지고, 사건들이 일어났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제에 대항해서 독립만세를 부른 군중집회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그만큼 장터는 오랜 옛날부터 우리네 삶에 있어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 우리네 전통적인 삶의 양식과 5일마다 열리는 닷새장은 어울림 자체가 민중적이듯 그 역사 또한 매우 깊다. 기록에 의하면 490년(신라 소지왕 12년)에 처음 개설된 경사시(京師市)를 장터의 효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경시(京市)와 향시(鄕市)로 구분이 되면서 형태를 갖춘 본격적인 장터가 형성 되었다고 한다 1808년(조선 순조 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이라는 책에는 당시 전국에 있던 향시의 숫자를 "경기도 102개소, 충청도 157개소, 강원도 68개소, 황해도 82개소, 전라도 214개소, 경상도 276개소, 평안도 134개소, 함경도 28개소"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비교적 농산물의 생산량이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활발한 시장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5일장은 읍내를 중심으로 하는 30리(약 12km) 이내에 읍장(邑場)이 1일과 6일에 서고, 이로부터 다시 30리 떨어진 곳에 3일과 8일장, 그리고 2일과 7일장, 4일과 9일장이 섰으며, 읍내에서 가장 먼 곳에서는 5일과 10일에 장이 섰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장날 만큼은 변하지 않고 잘 지켜졌으며, 큰 달의 마지막날, 즉 31일은 `무싯날` 또는 `무쇠날`이라 하여 장이 서지 않았다. 이 날이 장꾼들의 유일한 휴일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5일장은 곡물전을 비롯해서 가축전, 채소전, 어물전, 건어물전, 옹기전, 옷전, 과일전, 잡화전 등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다. 지방에 따라, 또는 장이 서는 시기에 따라 다소 그 규모는 차이가 나지만, 내륙 지방의 장터는 대체적으로 어물전이 붐비고, 바닷가에서 가까운 장터일수록 곡물전과 채소전이 성시를 이룬다. 그런가 하면 각 장터마다의 독특한 특산물이 한 두개씩은 꼭 있어서, 그 특산물을 사기 위해 먼 곳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경기도의 강화장은 인삼과 화문석이 유명하고, 강원도의 정선장은 토종꿀과 칠보석이 유명하며, 전라남도의 영암장은 참빗이 유명하다. 그리고 경상남도의 밀양장은 깻잎과 도자기가 유명하고, 충청북도의 괴산장은 고추와 버섯이 유명하며, 전라북도의 무풍장은 호두와 고랭지 채소의 명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울러 이 같은 특산물 중에는 영암의 참빗이나 밀양의 도자기처럼 일년 내내 제작이 가능한 것도 있지만, 무풍의 호두라든가 괴산의 고추처럼 출하되는 시기를 맞추지 않으면 구경조차 못하는 것도 있다. 어김없이 닷새마다 찾아오는 장날에는 그 지방 고유의 특산물 외에 떡장수, 술장수, 엿장수 등 먹거리를 파는 장사꾼들이 많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조차 어렵게 되어 버렸지만 장터에는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연희패들이 있었다. 이 떠돌이 연희패들이 장터에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장타령이다. 특히 장이 크게 열리던 곳에서는 장꾼들이 연희패들을 동원하여 장터를 더욱 흥청거리게 만들기도 했다. 뭔가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장터로 많이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재래식 5일장은 조선 시대 때 활발한 행상활동을 벌였던 보부상(褓負商)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보부상이란 보상과 부상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보상 (봇짐장수)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고, 때문에 속칭 `봇짐 장수`라고 불렀다. 이에 반하여 부상(등짐장수)은 상품을 지게에 지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보부상은 주로 장터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지방의 크고 작은 장터는 모두 이들 보부상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기에 보부상은 하루만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형성되어 잇는 향시망(鄕市網)을 오가며 물건들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서로 단결력을 강화하고 스스로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장문법(杖問法)이라 불리는 자치규율법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위반 했을 때는 제명처분을 비롯한 각종 엄중한 처벌이 내려졌으며, 일단 제명된 사람은 다시 보부상으로 활동할 수 없도록 추방을 시키기도 했다. 장문법에 의한 대표적인 벌목에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은 자 매 50대, 말을 공손히 하지 않은 자 매 50대, 환자를 돌보지 않은 자 매 25대, 매점매석 등과 같은 상행위 문란자 매 30대, 어른을 능멸한 자 매 25대, 그리고 사람이 죽었는데 문상을 하지 않은 자 매 25대와 벌전 5전 등이 있었다. 그러나 혹독할 정도로 엄격한 장문법과 함께 전국을 무대로 폭넓은 활동을 펼치던 보부상 조직도 1910년대에 이르러 일본 관청에 의해 강제로 장터에서 축출되면서 점차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끝나면서 잠시 보부상 조직이 재건되는 듯 했으나, 곧이어 6.25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곳곳에 상설시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설 곳을 잃은 보부상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교통이 발달하고, 전국의 주요 도시에 대형 쇼핑센터들이 들어서면서 보부상들의 활동무대였던 5일 장터 역시 하나 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재래식 5일 장터는 대략 400여 군데. 그 중에서도 전남 강진장(4일․9일장), 전북 순창장(1일․6일장), 전남 보성장(2일․7일장),경남 창녕장(3일․8일장),경북 예천장(2일․7일장), 충북 진천장(5일․10일장) 등을 비롯한 50여 군데의 장터는 비교적 재래식 장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다 지금도 장날이면 주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꽤 성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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