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이란 단어는 근대소설에 자주 나온다. “머슴에게 자전거를 내주어 읍내에 급보를 하였다”는 식으로 심훈의 ‘상록수’에도 나오고 머슴이면서 소작농 이방원이 주인공인 나도향의 ‘물레방아’에도 나온다. 개화기, 근대를 거쳐 현대 초까지만 해도 시골 지주집안에서는 머슴을 두는 일이 흔했으니 그런 시속의 투영일 것이다. 농촌에서 머슴이 사라지면서 ‘머슴’ 단어도 우리 주위에서 사용할 일이 없어졌는데 뜬금없어 보이게 ‘머슴론’이 등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오전 7시30분에 연 기획재정부 첫 업무보고 자리에서 ‘공무원 머슴론’이라 이름 붙일 만한 질타적 훈시를 공무원들에게 쏟아낸 것이다. 대통령이 편 머슴론 골자는 간단하다. “공직자는 국민을 위한 servant, 곧 머슴이다. (공무원 여러분들은) 국민에게 머슴 역할을 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편 공무원 머슴론은 국민의 입장에서 기분 나쁘지 않다. ‘높으신 분’ 고위공직자를 떠올리면 약간 민망해지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진작부터 공복(公僕)이라 불려오기도 한 공무원들은 직위 높이에 관계없이 머슴 역할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게 당연한 이야기로도 들린다. 공무원들은 국민이 내는 세금에서 월급 받으니, 국민의 심부름꾼 공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왔다. 사실 영어로도 공무원은 공복과 같은 의미의 civil servant라고 불리지 않는가? 그런데 국민들은 삶의 현장에서, 방문한 관공서에서 실제로는 공복이나 머슴을 만나 본 적 거의 없고 이런저런 규제나 단속을 하는 완장 찬 권위자, 인허가로 목에 힘 주는 마름 같은 인물들만 잔뜩 부딪치며 살아왔으니 대통령의 머슴론이 화제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머슴은 주로 지주집안에 연간 단위로 새경을 정한 후 고용되어 농사일, 집안 잡일을 해주던 남자이다. 머슴은 새경을 떼이기도 하고 쥐꼬리 만한 새경밖에 못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하인이나 배복(陪僕)과 달리 계약이 자유로웠던 듯 머슴 산 지 몇 년 후에는 돈 모아 지주집안을 떠나기도 했다. 머슴 사는 남자가 사라진 지금 ‘머슴’은 ‘선머슴’이니 ‘상머슴’ 같은 복합어 속에 그 흔적을 남겨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쓰인다. “차분하지 못하고 거칠게 덜렁거리는 사내아이”를 뜻하는 ‘선머슴’을 우리는 활동적이면서 쾌활한 여자들을 지칭할 때 쓴다. “일 잘하는 장정 머슴”을 뜻하는 ‘상머슴’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비유적으로 쓰기도 한다. “이명박 후보자를 상머슴으로 뽑은 국민은 성공한 국민이 될 것인가” 식으로 말이다. 취임 직후 “국민을 섬기겠습니다” 했던 이 대통령의 취임일성과 이번 머슴론은 일맥상통한다. 머슴론을 두고 잔뜩 딴죽 걸 필요는 없다. 딴죽 걸어 김 뺄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마당 쓸고 일해야 하는 머슴을 빗댄 머슴론적 발상은 이 지식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비판은 필요 없다. 초점도 어긋나 있다. 머슴론은 머리를 쓰지 말고 농경시대처럼 몸으로만 일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일하는 자세와 일하는 시간과 강도를 머슴처럼 하자는 뜻으로 읽힌다. 국민의 잡다한 요구를 언제든 처리하는 손과 발이 되라는 의미로 읽힌다. 해외로 진출한 기업, 은행의 세계에서는 주재원들의 행동전략으로 “머슴이 되라”가 진작부터 있었다. 문제는 대통령 훈시 따라, 공직자들이 정말 저 기저의 태도부터 바꿀 것인가에 있다. 박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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