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융 위기가 이내 온 세계로 퍼졌다. 이제 세계는,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하나의 체계다. 그래서 한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내 온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번 위기가 세계 경제의 중심부인 미국의 금융 시장에서 비롯했으므로, 그 영향은 특히 컸고 널리 퍼졌다. 미국 금융 산업이 공황에 무너지면서, 미국 경제가 깊은 불황으로 들어섰다는 징조들이 나온다.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과감한 ‘구제안’을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충분하다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이 다행스럽게 성공하더라도, 미국 경제가 건강을 회복하는 데는 오래 걸릴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중심이므로, 온 세계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답답하게도, 갑자기 닥친 위기에 대한 설득력있는 진단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시원스러운 처방은 더욱 드물다. 이번 위기가 워낙 복잡한 사건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지금 주류 경제학은 이런 파국을 설명할 이론을 갖추지 못했다. 자연히, 미국 정부가 내놓은 처방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경험에 많이 의존한 임상적 대응이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의 벤 버냉키(Ben Bernanke) 의장이 1929년의 대공황을 깊이 연구한 학자라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다. 그가 행크 폴슨(Hank Paulson) 재무장관과 함께 마련한 ‘구제안’도 대공황에서 얻은 교훈들에 바탕을 두었다. 이번 위기를 낳은 근본적 원인은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중앙은행이 경기를 떠받치려고 금리를 너무 낮게 유지한 것이다. 금리가 낮아 자금이 싸니, 미국 시민들은 소비를 늘리고 집을 많이 샀다. 그런 거품이 꺼지자, 집을 담보로 잡고 자금을 빌려준 은행들이 큰 손실을 보았다. 그래서 자금 시장이 위축된 것이 이번 위기다. 부동산 거품은 거의 모든 나라들에서 나왔고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런 거품의 존재다. 공교롭게도, 깔끔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현대의 금융 시장은 아주 촘촘히 얽혀진 체계여서, 한 금융 기업에 생긴 문제는 많은 기업들에 영향을 미친다. 금융 기업들이 알게 모르게 서로 투자하므로, 한 기업이 도산하면, 다른 기업들도 재정 상태가 갑자기 악화된다. 그래서 ‘곯은 달걀’을 골라내서 도산시키는 전통적 대응이 어렵다. 근년에 자신의 자금을 조금 투자하고 나머지는 빚을 얻어서 자신의 이익률을 높이는 ‘지렛대 방식(leverage)’ 관행이 널리 퍼지면서, 금융 기업들 사이의 상호의존도는 아주 높아졌다. 특히 파생 금융 상품(financial derivative) 시장의 폭발적 성장은 이런 상호의존도를 비정상적으로 높였다. 파생 금융 상품은 유가증권이지만 독자적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의 가치는 상품, 증권, 또는 통화와 같은 기초 자산(underlying assets)의 가치로부터 파생된다. 기초 자산의 미래 가치에서 자신의 가치가 나오는 선물 계약은 전형적 파생 금융 상품이다. 파생 금융 상품은 위험에 대비하는 연계매매(hedging)에 주로 쓰이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금융 시장 전체가 맞은 위험의 폭을 늘렸다. 이렇게 보면, 지금 세계 경제는 무리해서 ‘몸살’을 앓는 셈이다. 자금이 워낙 싸니, 많은 사람들이 빚을 내서 소비하고 집을 샀다. 그런 무리가 이번 몸살을 부른 것이다. 몸살은 괴롭지만 실은 더 큰 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다. 만일 몸살이 나지 않으면, 우리는 무리를 하는 줄 모르는 채 계속 무리를 하게 되어 더 큰 병에 걸리거나 급사한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이번 몸살은 세계 경제에 대해 더 무리하지 말라는 경고라 할 수 있다. 실은 이번 몸살은 너무 늦게 왔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세계 경제가 무리를 해서 거품이 끼었다는 신호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중앙은행은 그런 신호를 무시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중앙은행도 정치적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중앙은행 총재는 현인으로 존경을 받지만, 그도 비난은 피하고 인기는 높일 길을 고른다. 경기가 좋을 때, 경제가 무리한다고 경기를 낮추는 정책을 쓰면, 그는 거센 비난을 받는다. 특히, 자신의 치적에 마음을 쓰는 대통령이 경기를 일부러 식히는 정책에 순순히 따를 리 없다. 경기가 자연적으로 낮아져도, 경기를 되살리라는 압력을 받아 거의 언제나 금리를 낮추게 된다. 그래서 작은 몸살들로 끝났을 일을 이번처럼 큰 몸살을 앓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미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는 몸살을 앓고 좀 수척하지만 건강한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은행들 사이의 대출마저 끊었을 만큼 신용을 말려버린 공황은 곧 가라앉을 것이다. 공황은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지만, 오래 가지는 않는다. 물론 이번 위기가 수습되어 경제가 건강을 되찾는 일은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터이다. 이번 위기가 급한 대로 수습되면, 제도의 개혁이 따를 것이다. 위험 관리가 허술함이 드러났으므로, 새로운 위험 관리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긴요하다. 이 과제는 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먼저, 중앙은행의 정책이 품은 내재적 편향이 근본적 원인이었으므로, 이 위험을 관리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이 일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다음엔, 파생 금융 상품의 위험을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 기업의 차원에선 최고경영자가 파생 금융으로 기업이 지는 위험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그런 위험을 제대로 아는 최고경영자는 너무 드물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주 어려운 수학을 써서 마련된 파생 금융 상품들의 위험을 모른 채, 그저 수익이 많아지니, 그대로 둔 것이었다. 그 점에서 이번 위기로 도산한 금융 기업들은 일시적으로 높은 수익을 낸 ‘불량 거래자(rogue dealer)’를 방치했다가 도산한 금융 기업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금융 시장의 차원에서도 파생 금융의 위험을 관리하는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체계가 어떤 모습을 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모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파생 금융을 규제하는 방안을 생각하면, 뚜렷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방안은 많은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서 진화할 것이다. 현대의 파생 금융 상품들은 잠재적 가치가 크다. 그것들은 시장의 진화에서 나온 산물이자 시장의 진화를 촉진시키는 존재다. 그것을 너무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장은 모두에게 큰 괴로움을 주겠지만, 길게 보면, 이번 위기는 시장이 진화하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미국식 자유방임주의가 실패했다거나 경제적 자유주의가 근거를 많이 잃었다는 진단은 그런 사정을 읽지 못한 데서 나왔다. 확실한 것은 시장이 계속 진화하리라는 사실이다. 이미 금융 시장의 구조는 크게 바뀌었다. 그렇게 바뀐 구조 자체가 적응을 통해서 얻어진 소중한 지식이다. 복거일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