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잘사는 것만큼 잘 죽어야 한다고 줄곧 학자들은 역설해 오고 있다. 그 어려운 인생 힘들게 잘 살아놓고 죽을때 인간으로써 존엄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착역이 된다는 것이다. 종착역은 언제든지 인간이 그리워하는 향수이니까. 과연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일까? 생활에 따라 변수가 많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좋은 죽음이란 의외로 간단하다. 좋은 죽음이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 마음속으로 맺혔던 한을 풀어서 후회없는 현안하게 죽는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참으로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죽을 때가 되면 인연을 맺은 것을 하나하나 풀어서 더 미워하지도 않고 더 집착하지도 않게 마음을 간직해야 한다. 세계의 여러 종교들은 이승에 집착하는 마음을 피안으로 가는 길을 더디게 하고 힘들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의식이 꺼지기 전에 누구에게나 붙들고 그 원한 감정을 다 풀라고 했다. 그렇지가 못하다면 임종 당사자가 마음속으로 모든이에게 맺혔던 감정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정리를 잘하고 사랑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죽기가 힘든 모양이다. 임종자들에게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기계를 사용하여 쓸데없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생명 연장을 시도하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죽음을 맞이하는 방이 병원에 없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환자들은 여러명이 같이 쓰는 병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환자가 위급상태에 빠지면 생명을 연장시키는 많은 기계들이 환자를 마구 공략한다. 그러면 정작 환자야 의식이 없으니 괜찮을지 모르지만 다른 침상에 있는 중환자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나도 의식불명이 되면 저런 취급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그 환자뿐만이 아니다 같은 병실에 있는 가족들도 그 응급조치 기계들을 보고 경악에 빠진다. 수많은 호스가 몸을 관통하고 있어 사람이 아니라 물건처럼 보이기 때문일게다. 그러다 죽음을 기다리는 그 환자는 기계적인 죽음에 또 다시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병원의 여러 문제 때문에 그 시신이 그 침대 위에 몇 시간동안 방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제반양상을 보고 마음이 편해질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게다. 그래서 필요한게 환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영면실이다. 환자에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그를 영면실로 옮겨 가족들과 함께 하는게 최우선이다. 이방에서 환자는 자신의 인생을 조용하게 정리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서 마지막 배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위급상황이 생겨 강한 시술이 들어가도 그방에는 다른 환자들이 없으니 다른 환자들에게도 폐가 안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와같이 가장 필요한 방을 갖춘 병원이 거의없다. 그러니 오늘도 아니 지금도 임종하는 분과 그 가족들은 경황없는 상황 속에서 경악과 슬픔과 수치 등과 같은 극히 부정적인 감정속에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위의 이야기는 서울대 내과병원의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그가 덧붙였던 말은 아직도 내 귀를 쟁쟁 울린다. 병원 밑에 있는 영안실은 그렇게 화려하게 만들면서 왜 정말로 중요한 영면실은 만들지 않느냐는 것이다. 말을 듣고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어떻게 보면 죽을 당시는 혼이 육체를 떠난 장례식 단계보다 더 중요한 것일 터인데 우리는 또 체면치례 때문인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장례식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이 영면실 제정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고 한다. 빨리 통과되어 이벤 한국민들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수성 본사 회장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