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비가 붉게 불타던 단풍을 적시며, 한포기 배추위에 힘없이 내리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김장거리에 재래시장 좌판은 신이나 있었고, 수많은 갈치 떼들이 입맛을 돋우곤 하였다. 그러나 적막감마저 느끼게 하는 시장 거리에는 상인들의 한숨만 무리지어 다닐 뿐이다.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또한 현생의 괴로움을 후생의 행복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현생의 힘듦을 현생의 복락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인가. 우울한 경제지표의 끝을 모르는 하양곡선에 덩달아 서민들의 마음은 이미 한겨울 꽁꽁 얼음장이 되어 쉬이 녹을 줄을 모른다. 이와 유사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신라삼국통일부정설’이다. 북한학계에서 제기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에 영향을 받은 고구려정통설 등이 그 요지로 보인다. 광의의 의미로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무리하게 덧칠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우리역사는 고조선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 ․ 백제로 이어져간 것은 개연성을 충분히 확보할 수가 있다. 그럼 신라는 어디에서 온 사람들로 나라가 이루었을까. 정말로 천마에서 황금궤짝에서 알의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아니면 용성국 또는 완하국에서 배를 타고 왔을까. 기존 6부 촌장들의 씨족신화는 과연 사실일까. 이것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는 한 신라삼국통일부정설은 더욱 확대재생산 될 것으로 여겨진다. 한 가지 실마리가 있다. 신라 진흥왕 대에 영토를 확장하면서 순수비가 세워진다. 창녕과 북한산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함경도인 마운령과 황초령은 신라와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문제가 된다. 혹 동예나 옥저 등지에 살던 사람들이 남하하여 신라의 주축세력이 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특별한 전쟁기록 없이 이 지방을 차지한 것을 보면, 이것은 동질적인 세력들이 상주하고 있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주축세력을 북방기마민족으로 보는 학설이 오래전부터 존재하여 왔다. 금관이나 적석목곽분 등을 예로 들면서 설득력을 확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북방에서 어떤 루트를 타고 남하한 것인가이다. 아마도 동해안루트를 타고 동예와 옥저를 세우고 뒤이어 신라의 주축세력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 부정설이 존재하면서 ‘역사문화도시특별법’이 ‘역사문화도시딴지법’이 된 것 같아서 안타깝다. 천년의 왕도로 사국으로 나뉘어져 있던 한반도를 하나로 묶고, 여기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이기주의가 팽배하여 60여년, 120여년의 왕성이었던 도시와 천년왕도였던 도시를 동일선상에서 두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한다. 반도 동남쪽에서 출발한 신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문명의 개화가 한반도에 있던 다른 나라에 비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랑정신 등으로 무장한 젊은 화랑도와 뛰어난 외교력 덕분에 반도를 통일할 수가 있었다. 이것을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멸망하게 하였다는 논리로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 동시대 가장 시급한 나라 살리기에 각 나라들이 노력한 결과가 신라의 삼국통일인 것이다. 물론 고조선도 고구려도 백제도 가야도 우리 선조들이 이룩한 영광된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까지도 왜곡하여 재해석하려는 것은 마땅히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박진환 (주) 인터버드 부설향가 화랑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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