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을 제외하면, 조선의 여러 왕들 중 22대 정조만큼 오늘의 우리들 관심을 모은 왕도 드물다. 지난해 TV 드라마 ‘이산 정조’가 기획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 속에 방영된 것이 그를 실증한다. 드라마 방영 이전에도 정조에 대한 관심들은 적지 않았다. 정조에 관한 책들이 여럿 출판되었었다. 그의 개인사와 역사를 연결하여 저술한 책도 있었고 그의 문예∙문화정책에 초점을 맞춘 책도 있었으며 독살설을 제기한 책도 나왔었다. 국사편찬위 위원장인 정옥자 전 서울대 교수는 그를 ‘아름다운 사람, 정조’로 해설한 책을 냈지만, 그 반대로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는 그가 학문적으로는 우수했지만 개인적 불행 콤플렉스를 벗어나지 못한 채 국가를 통치해, ‘개혁’은 말 뿐이었다고 풀이한 책을 냈었다. 정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그의 특별한 개인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물론 `용비어천가`에 실을 만큼 출중했던 조선의 첫왕 태조의 활쏘기 능력을 이어받았다고 스스로의 활쏘기 능력을 해설한 정조의 활쏘기 에피소드들도 대중의 관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18세기 우리나라 역사와 정조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직간접으로 보면 정조는 특별한 임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정조가 세운 규장각이 왕의 시문이나 친필 서화, 혹은 고명(顧命)이나 유교(遺敎) 등을 보관했던 수장고로만 기능했던 것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국립도서관이면서 젊은 문신들의 재교육센터이기도 했다는 연구결과를 보아도 그렇다. 그 정조가 신하 심환지에게 직접 쓴 서찰 299통이 한번에 공개되어, 화제가 끊이지 않는다. 이제까지 공개된 역사 속 인물 그 누구의 서찰도 이렇게 많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또 왕의 친필 서한이다. 우리나라 서간문학사는 일부 수정이 불가피할지 모른다. 서찰 내용 전체가 해석되고 분석되면 18세기 우리나라 정치사도 재해석 될 가능성이 높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에서도 정조 서찰을 두고 화제가 가득하다고 한다. 정조의 편지에서 ‘젖 비린 내 나는 놈’ ‘호로 자식’ 등의 욕설이 튀어나온 것을 나라의 지도자가 겪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하는 인사도 있단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반대파로 알려졌던 심환지에게 정조가 몇 백 통에 이르는 편지를 보낸 것은 적을 포함한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고 설득하려는 정치적 파워게임이자, 대화와 소통의 정치방식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정조 서찰 공개가 새삼 청와대와 정치권이 `대화와 소통의 정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니, 역사는 숨 쉬고 오늘과 역사는 닿아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정조는 매력적인 임금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제 누구나 웹에서 다가갈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을 찾으면 그곳에 실린 정조 행장(行狀)과 본문들을 통해 정조의 행적과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인사를 고르게 하겠다는 의미로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액자를 침실에 달고 살았던 정조는 왕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1만개의 물 흐름과 같은 백성들을 비추는 태극 같은 달이라는 의미로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예로부터 임금들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사건이면 그것을 혐의롭게 여겨 불론에 부치는 것이 너그러운 도량인 것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의리(義理)가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명철한 임금들도 그러한 실수를 면하지 못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정조는 대화정치에 관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언로(言路)는 국가로 치면 혈맥(血脈)인데 요즘 와서는 조용하기만 하고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으니 아마도 과인(寡人)이 과오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리를 물려받은 초기에 바른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위에 있는 사람이 통솔을 잘못하기 때문이기는 한 것이지만 말하는 것이 직분인 자들로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왜 죄가 아니겠는가. ……” 이러니, 정치권이 정조 서찰에 주목하는 일은 당연해 보인다. 박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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