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수원(당시 한전)에 입사하고 고리에 있는 원자력교육원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고 있을 때 어느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창의력이 필요 없다. 창의력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시도하려다가 문제를 일으킨다. 원자력 발전소에는 매뉴얼을 충실히 따라 할 수 있는 사람들만 있으면 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하고 고민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사업소에 배치되고 나서 10년 넘게 근무하면서 느낀 것은 그 교수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다. 매뉴얼을 충실히 따를 수 있는 능력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창의력이 필요 없는 곳은 없다. 매뉴얼을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라도 창의력이 필요하다. 매뉴얼에는 밸브를 열어라, 닫아라 같은 지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매뉴얼에는 보다 높은 차원의 조건들이 제시된다. 예를 들면 ‘어느 계통의 압력은 얼마 이하를 유지하여야 한다’, ‘어느 기기는 온도변화율이 얼마 이하여야 한다’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이해하고 만족시키려면 창의력이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원자력은 외국에서 개발된 첨단 기술이고 국내 직원이 창의력을 발휘해 개선할만한 여지가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력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분야이고 첨단 과학과 기술이 집약된 산업인 것은 사실이지만 원자력도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서 발전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운영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이것은 우리 직원들이 창의성을 발휘해 이룩한 개선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자력은 그 특성상 안전이 강조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수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창의력이 필요 없다고 말했던 그 교수도 그러한 태도를 지나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지만 창의력이 발휘되기 어려운 보다 더 큰 이유는 자신감의 결여 또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에서는 원자력 르네상스를 예측하며 신형 원자로 또는 사용후 연료 재처리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논의가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며 다소 맥빠진 듯한 느낌이다. 원자력 기술 자립도 이제 거의 이루어져간다고 하지만 너무 느리게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제야 기술 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와 같이 원자력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창의력은 억눌러야 할 것이 아니라 계발해야 할 것이라며 격려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재신 월성원자력 제2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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