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의 재산 형성에는 1대 최부자 최진립의 아버지 최신보에서 부터 시작된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종가(宗家)를 지키고 있는 최부자 종손 최채량씨의 증언에 의하면 최신보는 이조리의 참봉 황임종의 여식에게 장가를 들었고 아들이 없던 황참봉이 세상을 뜨자 그의 재산 전부가 자연적으로 최신보에게 상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진립이 세 살 때 어머니 황씨가 죽자 주변의 강씨를 다시 계실(繼室)로 맞이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강씨의 아버지 역시 아들이 없어 재산 전부를 훗날 최신보에게로 물려주게 된다.   이 두 집안에서 상속받은 재산들이 최부자 가문이 일어서는데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1대 최부자 최진립은 재산형성에 큰 관심이 없었고 2대 최부자인 최동량은 병작반수제의 조건을 내 건 농지개간 사업으로 많은 농토가 늘어나 여기서 만석꾼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장남 3대 최국선 대에 이르러서는 주변의 황무지개간 및 수리시설, 이앙법 등을 이용한 신 농법으로 재산이 급증하게 되어 말년에는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최국선은 슬하에 2남이 있었고 장남 최인기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기반으로 더 많은 재산을 증식시켰다.   그가 37세 되던 해(1687년)에 작성한 호적을 보면 노비가 22명에서 66명으로 늘어났고 1705년에는 무려 94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손자인 최종겸 대에 와서는 59명으로 줄어들었고 그의 외아들 최옥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사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노비가 3명만 남고 재산은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하여 4대 최부자가 처음에는 장남 최인기계로 이어지는 듯 했으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재산이 점차 줄어들었고 차남 최의기계의 재산은 점점 더 늘어나게 되어 최부자의 정통성은 차남으로 이어졌다.   훗날 밝혀진 기록에 의하면 차남 최의기가 분가할 때 받은 볏섬 속에는 큰 뱀이 들어 있었다는데 이것은 부(富)의 전승이 최의기 쪽으로 넘어간 것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최의기의 장남 5대 최승렬과 그의 손자 최종률 대에도 계속 재산이 불어나 거의 만석에 가까워지면서 최부자 400년의 절반인 약 200년을 이곳(이조리)에서 생활하였다.   세월이 지나 7대 최언경대에 이르러서는 더 많은 재산으로 집은 협소하고 늘어난 식솔들과 함께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지금의 교동으로 이거를 하게 되었다.  7대 최언경에서 부터 12대 최준까지 이주해온 교동에서 생활하며 만석의 재산을 유지해 왔으나 마지막부자인 최준 대에 이르러 일제 강점기로 인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최준은 그 당시 독립 운동가였던 안희재를 만나 독립자금으로 많은 돈을 나라에 바치고 나머지 재산은 교육문화 사업에 투자하면서 화려했던 400년의 신화는 끝이 났다.   그 흔적이 현재의 대구 영남대학교이며 최준은 본의 아니게 재단운영권조차 빼앗기고 1970년 9월 15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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