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양남면 나산리 555번지에 위치하는 나산서원(羅山書院)은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399~1456) 선생의 향례를 올리는 서원이다. 나산리 입향조 김제학(백촌 김문기 선생의 6세손, 김녕 김씨 14세손) 선생의 후손들이 매년 향례를 올리는 이 서원은 경주 최남단에 위치하며 해안지역에선 유일하게 설립된 서원이다. 나산리 마을 안길을 따라 깊숙이 걸어 들어가면 민가로 둘러싸여 있어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내 당당하게 우뚝 자리하고 있는 나산서원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입구 즈음에 있을법한 서원에 대한 이정표나 안내판이 없어 서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새로운 인구 유입이 덜해 점차 마을은 쇠락해 가지만 김진선 문중회장을 비롯해, 후세 사표로 전해지는 조상을 모시고 있는 후손들의 자긍심은 여전했다. 서원에 들어서면 한눈에도 서원의 전형적 양식을 갖춰 백촌 선생의 충의와 절의를 표상하는 데 손색이 없어 보였다.조철제 경주문화원장의 ‘경주유교문화유적’을 일부 참고해 나산서원의 기원을 재구성해 보자. 붕금산 아래 자리잡은 나산서원은 백촌 김문기 선생의 위패를 모신 ‘나산사(羅山祠)’였다. 나산사는 1780년(정조 4년)에 설립하고 영정을 봉안했다. 19세기 초 이 영정은 남산 용장사 매월당 영당으로 옮겨져 매월당 영정과 같이 봉안된 적이 있다. 나산사는 1870년(고종 7년)에 훼철됐고 이후 1936년 석채례를 봉행하면서 ‘나산서당’이라 불렸다. 조상을 숭모하는 향사를 받들고 후손들이 업을 익히는 곳으로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9년 묘우 숭절사(崇節祠)가 복원됐으며 동재는 강의재(講義齋), 서재는 병충재(秉忠齋)다.‘백촌선생실기’에 따르면 김문기 선생은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27세 때 문과 급제해 예문관 검열을 비롯해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426년(세종 8년) 27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해 예문관검열, 정언,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문종 때 함길도 관찰사로 나가서 둔전제를 실시해 큰 공적을 남기고 단종 보호의 고명신(顧命臣)이 됐다. 단종 때, 형조참판을 역임했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반대파 입장에 섰다.수양대군은 계유정난에 성공해 왕위에 올랐고 선생을 불러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삼았다. 그러나 불의한 방법으로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켜야 한다며 유신(儒臣)들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거사를 진행했다. 이들의 거사는 순조롭게 끝나지 못했고 끝내 김질의 밀고로 인해 모두 추포됐다. 선생은 성삼문, 하위지 등과 같이 혹독한 고문 끝에 순절한다. 이후 후손들은 상주에 전입하고 3대에 걸쳐 관노 생활을 한다. 선생의 증손 김제학은 영동으로 옮겨 살다가 다시 가솔을 데리고 경주 동해 이곳, 나산리의 입향조로 이거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생은 1731년(영조 7년) 신원이 복관됐고 1778년 (정조 2년) 시호 ‘충의(忠毅)’가 내려졌으며 좌찬성에 증직됐다.제향은 매년 3월 행하고 있다. 1999년 이 서원에 묘우를 세워 ‘나산서당’으로 향례를 행하다가 2010년 6월 향중 공의에 따라 나산서원으로 승호됐고 지금까지 문중에서 관리하면서 현창해 오고 있다. 나산서원은 대지 800평에 묘우(숭절사) 1동 3칸, 강당(인교당) 1동 4칸, 동재(강의재) 1동 3칸, 서재(병충재) 1동 3칸, 전사청 1동 3칸, 외삼문(수덕문) 1동, 내삼문 2동. 관리사 등을 갖춘 조선시대 전형적 서원의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는 서원 앞마당에서 동해바다가 바라보이는 명당중 명당이었다고 한다. 김진선 김녕김씨 문중회장은 “이 마을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포근한 지형이어서 지나가던 사람들도 마을 지형을 칭송할 정도였다. 마을 앞 바닷가에는 소나무가 우거져 아름다웠다”고 회상했다.김 회장은 또 “경주시 서당과 서원이 약 30개소 있는데 지금까지 향례를 모시는 곳이 26군데 정도로 알고 있다. 나산서원만큼 짜임새 있는 서원은 흔치 않다”고 덧붙였다. 강당 오른쪽 마당에는 2019년 5월 세운 비석이 있는데, 바로 나산 문중에서 발견한 지석이었다. ‘범바우산에 모셔진 묘소를 옮기면서 당시 상석 아래 묻혀있던 지석을 후손들이 발굴해 후세에 알리고자 이곳 나산서원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는 지석에는 ‘임진 3월’에 이곳에 입향했다는 기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김진선 문중회장은 “백촌 선생은 충의와 절의로 관철된 삶의 행적이나 역사적으로도 경주에서는 굴지의 어른으로 숭상돼야 하는 인물”이라며 “서원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서원 주변 50~100m 이내 민가들이 인접해 있어 불허됐다”고 했다. 문화재적 충분한 가치가 있음에도 서원 주변 민가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부분과 상충되는 안타까운 대목이었다.입향조 이래 400여 년 된 나산리에서 김녕 김씨 일족이 가장 번성했을 때는 100년~150년 전으로 당시 350여 가구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월성원전이 들어서면서 각 성씨가 같이 살고 있지만 여전한 김녕 김씨 집성촌이다. 나산서원은 월성원자력본부 홍보관에서 서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져 있고 자동차로 5분 정도 걸린다. 나산리 입구 마을회관에 자동차를 세우고 느끼며 서원까지 걸어가면 전형적인 양반마을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이 콘텐츠는 ㈜한수원 월성원자력본부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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