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성화를 그리는 일을 했는데, 한 개인이 한 성당의 성물을 모두 맡아 제작하는 일은 드물잖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기도 하고요. 평생 주님의 일을 했고, 첫 순교자 성당이니까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두려움 없이 받아들였어요” 9월 2일 축성식을 가지는 전주 ‘권상연성당’ 건축물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신해박해 230주년 기념성당으로 지정된 이 성당 안팎의 모든 미술 작품을 경주 작가 정미연(67·아기 예수의 데레사) 화백이 제작해냈다. 오로지 한 예술가의 손에 의해 이 성당의 성화와 성물 일체가 제작된 것이다. 그것도 2021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항암치료를 이겨낸 후, 제작 1년여 만에 대위업을 이뤄낸 것이다. 남프랑스 작은 마을 방스에 있는 ‘로사리오성당’의 성화 모두를 화가 마티스가 그려 더욱 알려졌다면, 정미연 화백의 성화를 비롯한 성물 일체에서 얻는 한 줄기 구원과 위로의 ‘빛’은 예술과 종교의 순일한 경지로 우리를 인도한다. 경주 배동 남산자락에 살며 경주의 혼과 교류하고 감명받는다는 서양화가 정미연 화백은 금세기 한국화의 거목인 소산 박대성 화백의 부인으로, 부부화가로 알려져있다. 정 화백은 평생 성화를 그리고 성물을 제작해 온 작가다. 서울대교구 등 많은 교구의 주보 표지 작품을 비롯해 성당을 장식한 작가로, 깊은 신심에 기초해 왕성한 창작 활동을 선보여왔다. 그런 정 화백이 한 차례의 수술과 12번의 항암 치료를 했던 췌장암을 이겨내고 권상연성당의 모든 성물을 제작해냈다.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내야 했던 그였지만 결코 낙심하지 않았고 신앙인으로서 시련을 달게 받아들였다. 성모와 순교자의 고통을 주제로 하는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전념해온 그는 시련조차 신의 은총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교회 미술품은 회화와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장르를 커버해야 한다는 점에서, 권상연성당과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수 있는 정미연 작가의 만남은 어려운 퍼즐을 환상적으로 맞출 수 있는 매우 드문 조합이었다. 정 화백은 그렇게 희귀한 사례를 현실화시켰다.권상연성당의 완공 이면에는 정 화백의 끝없는 기도와 눈물의 결정체가 오롯이 담겼다. 1년여 만에 제대 십자고상부터 성수대, 성당 안과 마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한국 가톨릭 교회 최초의 순교자 교회임을 인식하게 하는 윤지충과 권상연 형상의 조각상, 양쪽 벽면과 성당 입구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성당의 모든 성물이 ‘왼쪽 첫 번째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더니 불쑥 혹이 생긴’ 그의 손끝에서 완성된 것이다. 이 성당의 성물 작업은 처음부터 정 화백을 염두에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주임 박상운(토마스) 신부의 제안으로 전격 이뤄졌다. 정 화백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비롯, 제작할 작품이 너무 많았고 수술과 함께 항암치료를 받고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안을 망설였다”고 한다. 주춤하던 그에게 부군인 박대성 화백의 격려는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됐다. 가족과 지인들의 격려 속에 작업은 시작됐고 성물들을 제작하며 작품에 몰입하는 ‘은총’의 나날이 이어지는가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성당 성물 작업 마무리를 석 달여 남겨놓은 상황에 항암치료 후 정기적으로 받아왔던 혈액검사에서 간에 작은 암세포가 생기는 재발의 신호가 감지된 것이었다.굴하지 않았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기도와 조언으로 기력을 되찾은 정 화백은 성당에서 가까운 고창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지내며 봉헌할 작품에 매진해 기어이 대위업을 완수해냈다. 권상연 성당의 성화와 성상, 성물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절로 묵상이 되고 따사로운 울림을 요동치게 한다. 성당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성물은 제대 위의 ‘고통의 십자가상’으로 성당 안과 밖을 잇는 구심점이 된다. 긴터널의 아픔 속에서 3m 50㎝의 대형십자고상이 완성됐다. 그리스도가 경험했을 몸과 마음의 극심한 고통이 생생히 묘사돼 보는 이의 감정을 정제시키고 고요한 묵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순결한 힘을 지닌다. 이주환 미술평론가는 “정 작가의 작품은 생생한 리얼리티의 구현에 적절한 추상성과 디자인적 요소를 도입해 그 자체의 미적 성취를 넘어 숭고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종교와 예술은 신비라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그 신비의 체험은 종교적 체험인 동시에 예술적 체험이다. 그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느끼게 하는 권상연성당이 세상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정 화백은 “한국교회 첫 순교자를 기념해 세워진 이 성당에서 처절한 순교를 통해 우리에게 신앙을 남겨준 순교자들에게 감사드려야한다”면서 “이 성당이 예술과 종교로서 치유하는 장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전주교구는 지난 2021년 한국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 등 세 복자 유해 발견을 기념해 효자4동 성당을 ‘첫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지정하고 `권상연성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