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이란 인권운동가인 나르게스 모하마디가 선정되었습니다. 노벨위원회는 모하마디가 이란의 여성 억압에 맞서 싸우고 모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한 공로를 수상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는 현재 수감 중인 몸으로 노벨상 수상 소식도 옥중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이란 내 여성 인권 증진과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활동을 해 오는 동안 모하마디는 이란 당국에 13번 체포되고 그 중에 5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일 년 전 히잡 착용 문제로 도덕경찰에게 끌려가 조사 도중 의문사한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이란 내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모하마디는 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현재 반국가 선전 활동을 이유로 수감돼 있습니다.   1976년 세속주의에 물든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당시 종교 지도자인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정치에서도 최고 권위를 지니며 신정 일치의 이슬람공화국을 지향 다했습니다. 법에 앞서 꾸란이 모든 도덕률의 잣대가 된 도덕성의 기준이 특히 여성에게 엄혹하게 적용되어 왔고, 이런 배경 아래 마흐사 아미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미니의 죽음은 분노한 이란 여성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도덕률에 반발하며 일어나게 했고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던지거나 불태우며 히잡을 쓰지 않을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정부의 잔혹한 시위 진압으로 수백 명의 여성이 구금되고 생명을 잃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란 의회는 지난 9월 20일에 ‘히잡과 순결법’을 통과시켜 복장 규정과 순결성에 어긋난 여성의 경우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여성에 대한 억압을 더 강화했습니다.   사실 과거부터 살피면 여성을 제약하는 수단이 히잡뿐인 것은 아닙니다. 같은 중동 지역에 문화 기반을 둔 유태교와 기독교의 구약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은 곳곳에 나타납니다. 과거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문화는 여성에게 자신의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남성이 만든 도덕률에 맞는 수동적 삶을 살도록 강요당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의 기도처인 ‘통곡의 벽’에 남녀가 따로 입장하는 분리 입장이 지켜지고, 기도하는 공간도 남녀를 구분하여 사용하게 하는 등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도 비구니는 비구보다 지켜야 할 계율의 항목이 더 많기도 하거니와 ‘8경법’은 여성인 비구니가 남성인 비구를 공경해야 할 8가지 계를 이르고 있어 여성이 남성보다 하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가톨릭에서도 지금은 쓰지 않는 여성이 많아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미사 중에 남성의 민머리와 달리 여성은 꼭 미사보로 머리를 가렸습니다. 이 모두가 남성에 비해 여성을 하위에 두었던 고대 문화적 유산의 잔재입니다.   나의 첫 직장으로 경북 북부지방에서 근무할 때, 지역 여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률이 그 지방 주요 농산물인 고추 값의 등락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봤습니다. 고추 값이 폭락하면 여학생들은 정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하면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산업체부설학교로 가거나 진학을 한 해 미루어 다음해의 고추 작황을 기다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남학생의 고등학교 진학률과 가정 경제 상황의 상관관계는 여학생의 경우만큼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공부를 시킬 때도 딸보다 아들이 우선이라고 믿는 부모들의 당연한 선택 때문이었지요.   미국의 경우에도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가 1950, 60년대 여성들에게 교묘한 억압을 조장하고 있었다고 미국 여성 운동의 대모였던 베티 프리던은 말합니다. 당시의 젊은 여성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더 많이 교육 받고 사회 활동의 기회도 더 많이 주어졌음에도 여성에게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가정이라는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조차도 대학 졸업 이후 사회생활보다 예쁜 집을 꾸미고 출근하는 남편을 마중하고 대여섯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동경하던 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권태감, 우울증을 호소하거나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상담하는 여성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미국 내 여성운동의 전환을 주도했던 베티 프리던은 자신의 저서인 ‘여성의 신비’에서 여성들에게 사회활동과 평생 교육 및 자기계발을 위한 프로그램이 도처에 널려 있음에도 대학 내의 전통적 교육자들과 기능주의적 사회과학자들은 교육을 통해서 여학생들이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동경하도록 부추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가 사람 사이의 차별을 묵인하거나 조장할 때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습니다. 종교 이데올로기에 의한 여성 억압이든 교육이나 사회 문화적 분위기의 암묵적인 억압이든,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남성에 의해 제한되던 과거의 잔재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히잡이나 부르카를 착용하는 문제든, 사회생활보다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하든 온전히 여성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면 거기에 억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슬람 여성들이 자신의 머리와 얼굴과 몸을 가리는 복장을 하더라도 자신들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것이라면 억압이 아닙니다. 히잡 혁명은 이슬람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양태를 여성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자유 의지를 표백(表白)하는 이란 여성들의 행동이며, 나르게스 모하마디의 노벨상 수상은 이란 여성들에게 보내는 세계인의 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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