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33-1번지에 가면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포저 조익(1579~1655) 선생의 묘가 있다. 그는 1602년 25세에 별시문과의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 정자에 임명되어 그때부터 관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3년) 34세의 나이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정여창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다시 이조좌랑에 임용되어 조정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직재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 상을 당해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3년 상을 마친 뒤 관직에 복귀하여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48년에는 좌참찬에 이르렀고 효종 때에 우의정 그리고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1655년 3월 세상을 떠나 광주 명고서원 개성의 승양서원 신창의 도산서원 등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곤지록 중용주해, 대학주해, 서경천설, 포저집 35권 18책이 전한다. 조익선생은 성리학의 대가로 예학에도 밝았으며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하니 효종은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大興) 동화산(東華山) 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의 산세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의 한줄기가 신양면 시왕리의 명우산(370m)을 일으키고 여기서 다시 남서 그리고 서쪽방향으로 하나의 지맥을 뻗어 나가다 혈장 뒤 주산(240m)봉을 일으켰다. 주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지맥을 뻗어 지현굴곡과 과협을 거친 후 본 혈장을 만들었다. 현무봉에서 혈장까지는 2번이나 과협을 하였고 마지막 절 우측에는 요성이 붙어있어 우선으로 입수하였으며 지현하는 마디가 짧기 때문에 용맥에 힘이 있어 혈장에는 지기가 아주 왕성한 곳이다.    풍수고서 『인자수지』에서는 혈장 뒤 과협이 없으면 혈이 맺히지 않는다 하였고 과협은 혈을 맺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용을 살필 때는 반드시 과협을 살피라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식견으로는 과협을 지나 점혈을 함에 있어서 입수와 마지막 절 우측 요성의 위치를 볼 때 현재의 묘 자리 보다 약 5m 정도 더 밑으로 내려와 점혈이 되었으면 하는 소견을 가져보았다.    그렇지만 조익선생의 묘소 아래에 그의 아버지 묘소가 써져 있어 아버지 바로 위에 쓰기엔 역장으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정혈처에서는 조금 벗어난 듯하다. 풍수에서는 ‘심룡삼년(尋龍三年) 점혈십년(點穴十年)’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용을 보는데 3년 공부요 점혈하는 데는 10년 공부라 하여 정확한 지점에 시신을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무리 좋은 명당 길지를 찾았다 하더라도 정확한 지점에 시신을 묻지 못하면 허장(虛葬)이 되고 제대로 된 발복을 기대할 수 없다. 이곳의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며 좌향은 乙坐辛向의 서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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