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소한 언행에도 정이 드나 보다. 며칠 전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집에 귀가할 때 일이다. 아파트 후문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온다. “ 무거우세요? 들어 드릴까요?” 라는 살가운 말에 뒤를 돌아보니 이웃에 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평소 엘리베이터안에서 이웃과 마주쳐도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못 본 체 한 여인이 아니던가. 그날은 달랐다. 힘들어 보이는 필자에게 배려심까지 보여서다. 그동안 이웃에 수년 째 살아도 어찌 생겼는지 얼굴한번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여성이었다. 그 때 비로소 그녀 얼굴도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장바구니를 대신 들어 주겠다고 호의까지 베푸는 바람에 처음엔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반면 여성의 이 말에 지난여름 날 일이 문득 떠올랐다. 아파트 호수 둘레 길을 산책 했다 오는지 그녀는 땀 내음을 물씬 풍기며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그날도 역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필자를 못 본체 하였다. 이 때 그녀 오른쪽 어깨 위에 시커멓고 통통히 살이 오른 송충이 한마리가 꿈틀거리며 기어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수년 째 이웃에 살면서도 인사 한마디 건네지 않은 여인인지라 필자 역시 그녀 몸에 기어가는 송충이를 모른 척 외면했다. 이런 것을 두고 인간관계도 상대성이라고 했던가. 이로보아 상대방이 자신에게 보내오는 친밀감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아마도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어서 인가 보다.   그러나 필자는 그날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지난 일이 갑자기 뉘우쳐졌다. 한편 필자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타인에게 존중받기만을 바란 듯해서다. 이에 지난날 그녀 몸에 기어오르던 송충이를 알려 주지 못한 게 늦은 감은 있지만 마음으로나마 사과 할까 한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필자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던가. 비록 상대방은 인사도 안 나누고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지만 나잇살이나 먹은 필자 아니던가. 그동안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서 따뜻한 인사 한마디 나누었더라면 그녀의 태도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언젠가 지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굳게 닫힌 이웃집 문을 쉽사리 열 수 있는 것은 사랑과 관심이라고 말이다. 어찌 무거운 아파트 철제 문 뿐이랴. 상대방의 굳게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 수 있는 것도 내 자신이 지닌 따뜻한 온기에 의해서다. 비근한 예로 거북이 목을 든다면 지나치려나. 거북이는 한번 목을 움츠리면 장정 서너 명이 달려들어 빼도 잘 안 빠진다. 그러나 거북이를 따뜻한 곳으로 옮기면 슬그머니 움츠러든 목을 한껏 뺀다.   따뜻함은 거북이에게만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삶 속에서 이웃, 혹은 친구, 심지어 가족에게까지도 가장 절실한 것은 마음의 온기가 아닐까 한다. 요즘 언론에 비치는 뉴스를 보면 세상이 참으로 험악하고 비정하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도대체 인간이 지닌 성선설性善說은 한낱 구호에 불과하단 말인가.   36개월 된 어린 자식 생명을 친모 손으로 빼앗은 인면수심의 모성 이야기는 마지막 안식처로써는 어머니 품속이 최고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세상살이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다가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그 자애로운 품속이 마냥 그리워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자식에게 가장 대가 없는 사랑을 베풀고 온갖 세상사를 온 몸으로 막아주는 어머니라는 글자는 숭고와 희생의 상징어이다. 이런 어머니가 어찌 자신의 핏줄인 어린 자식을 무참히 살해한단 말인가. 또 있다. 오늘 뉴스를 보노라니 도대체 물질이 뭐길래 아무리 의붓어머니지만 돈을 노리고 살해, 암매장까지 한단 말인가. 세상엔 돈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게 있으니 그것은 사람답게 사는 일이며 가슴을 충만 시키는 따뜻한 정이다. 천륜을 저버린 사건들은 자기중심적 사고인 이기심에 의해서이다.이게 아니어도 마음이 냉랭하여 인정이 고갈되고 무미건조한 사람 곁엔 선뜻 다가서기가 엄두가 안 난다. 달리 말하자면 정이 안 간다고나 할까.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가슴엔 따뜻한 정이 흐른다. 이 정은 사랑일 수도 있고 이웃에 대한 이타심일 수도 있다. 해마다 연말이 찾아오면 구세군 자선냄비가 등장하는 것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따뜻한 정을 나누기 위한 한 방편이다. 요즘 눈을 돌려보면 생활고에 허덕이는 이웃이 의외로 많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경제가 불황이다 보니 중소기업을 비롯, 웬만한 소규모 직장인들 월급이 1, 2개월 밀리기도 한다. 막내딸이 다니는 병원에도 환자 수가 줄어 의사를 비롯 직원들 월급이 1, 2개월 밀리기 예사다.   “사랑도 돈이 없으면 창문으로 도망 간다”고 했던가. 가난과 궁핍 앞에 의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올 겨울 머잖아 북극한파가 닥친다는 일기예보가 있다. 혹한에 시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 혹시 주위에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올겨울엔 콩 한 쪽도 나눠먹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다.   가진 게 넘쳐서 타인과 나누는 사람은 별반 없다. 평생 김밥 행상으로 모은 돈을 아낌없이 기부한 어느 할머니 이야기, 언젠가 붕어빵 장수 아저씨가 쾌척한 장학금 이야기 등은 귀감이 되고도 남음 있다. 이들 모두 고단한 몸으로 동장군에 시린 심신을 추스르며 피땀 흘려 모은 돈이다. 단 돈 몇 만 원이라도 일 년에 한번 자선냄비에 투척하는 마음 역시 고귀한 이웃 사랑이다. 그 마음의 스위치를 지금이라도 아낌없이 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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