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페르시아의 거지 성자 시성 하페즈(Hafez:1325-1389)는 세월의 무상함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대 세월의 무상(無常)함이 얼마나 빠른지 알고 싶은가? 저 높은 강언덕에 올라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세월의 신속함이 마치 그와 같다네”   나는 하페즈의 이 싯구절 후반을 다시 각색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그대 세월의 무상함이 얼마나 빠른지 알고 싶은가? 저 높은 강언덕에 올라 흘러가는 강물을 보라 인생 삶의 하루를 산다가 하루를 죽어가는 실존적 현실이 마치 그와 같다네’14세기 시성 하페즈(Hafez)의 이러한 철학사상에 매료되어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서동시집(西東詩集)을 1814년에서 1819년 사이에 썼으며, 이는 괴테의 후기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영국 출신의 비평가 겸 역사가였던 토마스 칼라일(1795-1881)은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를 특별히 추종하고 존경했다.   그는 인간 삶의 실존적 현실을 이렇게 노래했다. “삶이란 무엇인가? 녹고 있는 얼음판 볕 좋은 해변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신나게 타고 가지만 밑에서 녹아들어 우리는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 어리석은 아기 헛되이 노력하고 싸우고 안달하고 아무런 자격도 없으면서 모든 걸 원하지만 작은 무덤 하나 얻는 것이 고작일세.”   또 한 해를 보내야 하는 12월의 길목에 우리는 서 있다. 검은 토끼의 해 계묘년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또는 하겠다고 했던 년 초의 약속과 계획과 다짐은 또다시 회한과 아쉬움으로만 남은 채 다시 다가오는 새해에는 하고, 발원을 하는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냉정하게 살펴보고 돌아보는 시간이다. 불교 경전의 핵심 내용 가운데에는 무명(無明) 또는 무지(無知)라는 말과 명지(明知)라는 술어가 있다. 쉽게 그 뜻을 풀이하면 무지(無知)는 모른다 이고, 명지(明知)는 분명히 안다라는 말이다.   그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무지(無知)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고귀한 네 가지 진리 즉, 四聖諦를 모른다 이고, 명지(明知)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고귀한 네 가지 진리 즉 四聖諦(苦,集,滅,道)를 안다이다. 그래서 사성제는 부처님이 설하신 5부 경전군 가운데 하나인 주제별로 모은 총 56주제로 된 상윳따니까야라는 경전이 있는데 여기에 제56주제 제1경의 첫 장에 등장하는 내용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모든 수행자가 삼매 수행을 하는 이유는 사성제를 꿰뚫기 위해서이며 출가자가 되는 이유도 사성제를 관통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수행자는 사색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사성제에 대해 말을 하고 사성제에 대해 사색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성제를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라고 부르며 사성제를 바로 알고 보았기 때문에 번뇌가 멸진한다.” 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성제를 모르는 무지(無知)라는 모른다가 자신과 남을 해하고 파괴한다.   그러나 화려한 대상에 거짓된 모습을 알아차리고(正知), 마음 챙김(正念) 한다면 걱정과 근심은 자연히 멸(滅)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 모른다. 즉 무지(無知) 속에 있으면 나의 오늘, 하루를 산다가 하루를 죽어간다는 이 실존적 현실을 누가 부정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의 진리를 체득해서 모른다라는 이 무지의 의식상태를 명지(明知)의 의식상태로 전환하면 오늘 하루의 산다를 팔아서 오늘 하루를 죽어가는 사형수 주제가 아니라 그것은 인식(認識)하는 마음의 오류이고,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게 된다라고 했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네 글자로 구성된 고귀한 ‘사성제’의 진리, 그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