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방학 숙제로 빠지지 않는 것이 일기쓰기였습니다. 매일 꼬박꼬박 써야함에도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아 번번이 방학이 끝나갈 때 쯤이면 지난 일기를 한번에 몰아 쓰느라고 애를 먹곤 했습니다. 간혹 친구들과 담소하던 중 다른 이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음을 들으면 나만 유달리 게을렀던 건 아니었구나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들인 일기쓰기 버릇이지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지어 사춘기가 되면서 다른 가족이 볼까봐 잠금장치가 된 일기장을 사서 책상 서랍 깊숙하게 감춰놓고 쓰기도 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이사 따위로 집 정리를 하다가 당시의 일기를 다시 읽어 보면 설익은 감상과 치기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잊고 살던 내 모습을 기억 속에서 불러내게 해 주는 나만의 역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 한 남자가 13년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일기가 있습니다. 벼슬을 하지 못했으니 그의 기록이 공적으로 남아있지 않으나 서른넷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생애 삼분의 일이 좀 넘는 시간을 그는 일기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는 조선 영조와 정조 때를 걸쳐 살다간 유만주(兪晩柱)란 이름의 선비입니다. 그는 일기에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라는 의미로 ‘흠영(欽英)’이란 제목을 붙이고 자신의 세세한 일상사와 집안 대소사를 위시하여 자신이 창작한 시문, 독서한 내용의 초록, 당시 서울의 동향, 조보(朝報, 조정에서 알리는 글)의 내용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개인의 역사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생활상도 알게 해 줍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과거공부로 보냈지만 번번이 시험 합격방(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자신이 그리도 되고자 했던 사관이 되지 못했으나 그는 일기로 자신의 역사를 썼습니다.   한문으로 쓰인 ‘흠영’을 편역한 ‘일기를 쓰다 1, 2(돌베개)’ 속 그의 모습은 ‘남산골 샌님’이란 말이 담고 있는 여러 의미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양반, 궁색한 양반, 그렇지만 대쪽 같은 기개와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고집으로 자신의 고고함을 지키는 사람–이 그대로 표상화된 모습입니다. 그가 살던 조선 후기도 오늘날처럼 돈과 권력이 큰 힘을 갖고 그것을 가진 사람은 내면의 모습은 막론하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며 큰소리를 치고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물질적 가난을 벗지 못한 사람은 비록 사대부라 하여도 아내의 잔소리와 핍박에 기가 죽는 세태가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기 속 유만주라는 사람은 조선시대 선비라는 평면적 이미지에서 걸어나와 꽃과 나무를 사랑하여 자신의 집 마당을 꾸미고 마당의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주는 심미적 감정과 사학자가 되고픈 열망을 지녔고 현실의 부조리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자식을 절절하게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의 시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면서 그의 미적 감각에 감탄하고 가난한 가장의 비애가 안쓰럽고, 과거 시험 목을 매는 선비들이 다투는 과거장 풍경을 씁쓸해 하지만 막상 자신도 그 거자(擧子)들 중 하나인 분열된 자아에 절망하는 그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라는 시간에 박제된 선비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토로하는 오늘날의 한 젊은이를 내 앞에 마주한 느낌입니다.   이희승 선생의 수필 ‘딸깍발이’에 평생을 과거 준비로 보내며 가난에 찌들어 사는 남산골 선비들의 모습을 희화하여 표현 한 곳이 있습니다. 비록 여름이고 겨울이고 달랑 한 벌뿐인 입성에 솜을 두었다 뺐다 계절을 나고 신발이라곤 걸을 때면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는 나막신 하나로 버텨 딸깍발이라고 놀림을 받아도 한겨울의 냉골에 앉아 마알간 콧물을 흘려가면서도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글 읽기는 멈추지 않던 백면서생들이지만 자존심과 기개 하나는 누구도 함부로 범접하기 어렵다 했습니다. 나라가 환란에 처할 때 먼저 나서던 이들도 그런 선비들이었고, 목숨까지 걸어가며 임금의 잘못을 간언하던 이들도 그들이었으니 그런 딸깍발이의 정신만은 살려 이어가야한다는 것이 수필의 요체였습니다.   딸깍발이와 유만주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의 품격과 행태입니다. 비록 나라에 중용되어 관리로 쓰이지 않더라도 항상 백성들의 삶과 나라의 현실을 고민하고 올바른 삶의 태도를 궁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주는 지식인의 품격입니다. 두 글을 읽다보면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여러 가지 난제를 이 사람들처럼 순수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관료나 정치인이 과연 있기나 할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많이 배웠다는 엘리트 관료와 엘리트 정치인들이 개인과 당파의 유불리에만 급급한 자신들의 싸움을 민생이라 핑계하는 어거지가 품격으로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역사가가 되고 싶었던 유만주는 사초(史草)로 쓰일 형식으로 일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친구 임노(任魯)와 약속하고 21세인 1771년 정월 초하루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그의 첫아들이 15살의 나이로 죽자 더 이상 글 쓸 의미가 없어졌다고 하며 일기쓰기를 접습니다. 그리고 일기를 그만 쓴 지 한 달 후 유만주도 34세를 생일을 앞두고 세상을 떠납니다. 죽으면서 그는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불태워 없애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차마 아들의 글을 태우지 못하고 남겨,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수장되어 전하며 조선 후기를 살다간 한 선비의 눈으로 줌인(zoom-in)된 미시사(微視史)가 전해집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