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부(富)를 원한다. 그러나 태고 적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늘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면서 상대적 결핍이라는 감정을 가져왔는데, 우리는 그런 심리적 상태를 ‘가난’이라 하였다. 물론 한정된 재화를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들이 때로는 식량이 부족하여 아사(餓死)하는 등의 절대적 결핍상태에 놓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가난’이 아니라 재난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사람들이 일찍부터 숲 속의 ‘오랑우탄’처럼 각자가 독립된 생활을 영위해 왔다면 애당초 ‘가난’이라는 어휘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문제는 부족이나 국가 등의 조직을 만들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부(富)의 점유 경쟁이 시작된 나머지 부자와 가난한자 내지 기득권과 비 기득권이라는 계층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한다.   ‘호모사피엔스’로 불리는 현세의 인간 종은 피부색이나 생김새와는 상관없이 99.9 퍼센터 이상 동일한 DNA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기득권과 비 기득권으로 나누어지는 불공정 사회를 만들어 왔는데, 이는 마치 백 미터 경주(競走)에서 목적지는 동일하지만 출발선이 제 각각 다르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가난한 것은 당신의 무능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고, 또 가난이라는 심리상태를 만들어내는 의식의 오류에서도 그 원인을 찾고 싶어진다. 즉,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질의 량은 한정되지만, 타인에 비해 무언가를 내가 더 많이 점유하고자 하는 소유욕은 절대로 한정되지 않기에, 이미 모든 인간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혹은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사이의 모든 갈등과 분쟁의 원인은 그 무슨 종교나 이념 따위의 복잡한 수사(修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의식구조의 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무한 소유욕이라는 것이 내가 가진 결론이지만,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 사람의 일생은 지극히 한정된 시간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의 량 이상을 점유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결핍을 강요하는 가해행위임을 몰라서일까? 그러니까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고, 피해자는 반드시 가해자에 대해 보복심리가 발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화가 유지되기 어렵고, 평화롭지 못한 사회는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나는 어떤 종류의 가해행위든 간에 타인에 대한 가해행위가 곧 자해행위로 귀납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말하려 했다.   이 세상에 스스로 태어나기를 원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기 던져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가 동등하다는 증거임으로 우리는 천부(天賦)의 인권을 얘기한다. 그런데 왜 동등한 천부의 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가 이토록 불공정한 인권사회를 가지게 되었을까?   혹자는 동등한 천부의 인권은 인정하지만, 개인 간 능력의 차이로 계층의 구분을 합리화하려 든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가 걷는 것을 보았는가? 아니면 갓 태어난 아기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는가? 모두가 강보에 쌓인 한 생명체에 불과했겠지만, 금수저와 목수저라는 태생적 구분은 단지 인간 사회가 그간 만들어온 인위적 제도의 산물이 아닌가라는 얘기다.   백 미터 경주에서 출발선이 동일하다면, 각 개인 간의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승선에 도착하는 시간은 간발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미세한 차이조차 불공정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때문에 나는 인간의 빈곤은 개인이 가진 능력의 문제이거나 반드시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온 제도상의 결함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은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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