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시 삼남동 근대한옥은 경산시 경안로21길 13-6에 위치한다. 이곳은 경산 시내를 관통하는 중앙로에서 청도 방향의 서상길과 경안로 21길에 속해 있다. 2020년 경산시에서 낙후된 구도심의 활성화를 위해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돼 안종철, 안동준씨 부자 소유의 토지와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현재 가옥은 안채, 사랑채 대문채, 창고 4동의 건물과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 장독대, 토석담장 등 부대시설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의 건립 시기는 건물에 남아 있는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1915년에 대문채를 가장 먼저 지었고, 3년 뒤인 1918년에 안채, 18년 뒤인 1936년에 사랑채를 차례로 지었다. 창고는 상량문이 없어 언제 지은 지는 알 수 없으나 건축형식으로 보아 사랑채를 지을 당시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넓은 대지의 중앙에 붉은벽돌로 정성스럽게 만든 장독대가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一자형 대문채, 남쪽과 서쪽으로 두 채를 ㄴ자형으로 연결한 사랑채, 북쪽에 一자형 안채가 정연하게 남향으로 앉혔다. 튼 ㅁ자형의 배치구성이다. 안채 뒤 대지 경계에 바짝 붙여 창고가 있다. 가옥의 배치상으로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많이 지어진 상류주거 또는 부농집 구성이다. 각 채는 건립 당시의 시대상 및 주생활, 집주인의 취향과 경제력 등을 짐작할 배치와 평면, 구조형태, 창호, 부대설비를 갖췄다. 즉 한옥과 일식(적산가옥) 두 건축형식을 혼용해 지은 근대한옥의 제반 특성을 갖고 있다. 가옥이 있는 삼남동은 예전 경산현 읍성의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성내 길 남쪽 일대의 지역이다. 읍성 내 삼남동과 삼북동은 동헌 및 객사와 같은 당시 읍치 행정시설과 함께 경산 제일 부자로 알려진 안부자라 불리던 순흥 안씨들과 일부 부자와 관리인이 살았다고 전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남동·하남동·성내동을 병합해 경산군 경산면 삼남동으로 바뀌었다. 1956년에 경산군 경산읍 삼남동, 1989년에 경산시 삼남동이 된 곳이다.    현재 삼남동에는 ‘원터’, ‘옥터’ 등 관청과 관련 있는 이름과 ‘성안’, ‘남밖’, ‘동밖’ 등 읍성과 관련이 있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읍성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 ‘읍성철거령’으로 철거 및 훼손됐다. 해방 후에도 읍성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급속한 도시개발과 시역 확장으로 대부분 없어지고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구 도심지로 낙후된 탓에 삼남동에는 오래된 집이나 상가들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이 오래전부터 살지 않는 집이나 상가는 흉물로 변해 방치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행히 경산시가 2017년 ‘경산시 도시재생지원센터’ 개소를 계기로 도시재생 뉴딜사업 주민설명회를 열고 서상길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본 가옥이 2020년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서상길 청년문화마을 도시재생 뉴딜사업 활성화 계획’에 선정돼 경산시에서 매입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용할 마을 카페와 청년주거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업은 구 도심지로 낙후된 이곳 지역을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중요 매개체로 삼고자 한 것이다. 경산시는 지난해 10월까지 4차례에 걸친 현장 자문회의와 고증조사를 통해 이 가옥은 여러 건축적 특징이 확인됐다.    첫째, 이 가옥은 예전 읍성 내에 많이 살던 순흥안씨의 여러 집들 중 하나라는 지역사 및 장소성이다.    둘째, 1915년에 대문채를 처음 지은 뒤 안채, 사랑채, 창고를 작게는 3년, 멀게는 18년이나 걸려 완성했다. 가옥 4동을 완공하는데, 30여년이 걸린 셈이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랜 시간에 집을 여러 채 지었지만 전형적인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상류 주거 또는 부농층의 채 구성과 규모, 부대시설를 갖춘 점이다. 집주인이 터를 마련해 집을 짓기 전 또는 짓기 시작할 때 이미 채 구성이나 배치 등을 계획하고 최종 계획대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셋째, 각 채에는 상량문을 남겨 건립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상량문은 대청의 종도리 밑 장여 옆면에 일본 연호로 쓰여 있다. 장여의 밑면에 중국 또는 대한제국 연호, 단기로 쓴 한옥과는 다르다.    넷째, 우리나라 남부지방 상류 주거 또는 부농층 배치유형이지만 대문채 위치가 특이하다. 한옥은 사랑채 전방에 대문채가 있어 집안으로 출입하는 사람을 사랑채에서 확인하기 쉽다. 골목이 동쪽에 있어 불가피하게 대문채를 여기에 설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현존 근대한옥에 이런 사례가 많아 상호 시기적 공통점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1915년과 1918년에 건립된 대문채와 안채는 한옥에 유리창을 단 정도이다. 하지만 1936년에 지은 사랑채는 거의 적산가옥 수준의 건축 구성과 자재를 사용했다.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목골 트러스조다. 건립시기에 따라 채별로 뚜렷한 건축 및 시기적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시기별 건축의 특성은 당시의 주생활 및 건축주의 취향과 경제력 등 당시 사회상도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안채의 정지의 천장에 취사시 나는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기 위해 천장을 뜷어 붉은벽돌조로 만든 환기구를 둔 점이다. 정지 천장에 환기구를 낸 사례는 송광사 하사당(보물), 해남윤씨 녹우당일원(사적) 등 한옥에서도 희귀한 시설이다. 근대기에 창고, 사무소 등에 간혹 이런 천장 환기구가 설치된 사례가 있으나 정지 천장에 설치된 사례는 드물다.    일곱째, 사랑채는 적산가옥의 다다미 규격에 맞춘 방 크기와 벽장·반침의 설치, 앞뒤로 장마루의 퇴와 유리미서기문 설치, 욕실, 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욕실은 탈의실까지 갖췄고, 바닥에는 우물을 파고 전용 펌프를 설치해 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다만 지붕가구는 한옥형이다.    여덟째, 안마당 중앙에 붉은벽돌로 정성들여 만든 장독대, 안채와 사랑채 정지사이에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 건물 곳곳에 사용한 붉은벽돌, 대지를 따라 쌓은 전통 한식 토석담 등의 부대시설도 예전 모습대로 남아 있다. 장독대는 당시 유리와 함께 새롭고 고급 건축자재였던 붉은벽돌을 사용했고, 정지 앞 안마당에 두어 주생활의 실용적 가사작업의 동선 양상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경산 삼남동 근대한옥은 한옥과 적산가옥이 혼용된 건축적 구성과 건립 당시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근대 건축사 및 주거사로 주목할 만한 가옥이다. 그간 구도심의 재생사업의 대상으로 선정돼 리모델링 과정에 근대한옥으로 보존가치가 인정됐다. 원형대로 보수 정비해 보존하되 체험 및 관광자원으로 다양한 활용 계획과 경상북도 등록문화재 등록지정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사업은 현재 진행 중인 도시재생사업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경산시와 주민의 노력과 활발한 참여로 오랜 역사를 가진 지역 문화자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도시재생의 다양한 신사업 개발에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삼남동 일대에는 주목할 근대한옥 및 적산가옥 다수가 남아 있다. 경산시는 이 가옥이 지역 고유의 문화자산을 활용해 특화지구로 확대해 구도심을 살리고 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지속 사업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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