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중국 춘추시대 사상가이며,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道)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성인(聖人)은 하늘과 마찬가지로 무진장한 도(道)의 생명력을 지닐 수 있다고 했다.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구원(久遠)하도다. 하늘이 영원하고 땅이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지는 영원하고 오래 살 수 있느니라(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자신을 남보다 뒤에 둠으로써 남보다 앞서게 되고, 그 몸을 남을 위해 버림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도다. 이는 성인이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성인은 결국 이렇게 해서 자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라(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이 구절에서 하늘과 땅이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체(一切)의 생명 활동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공익적 삶에 비중을 두고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생명의 영원성을 기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을 남보다 뒤에 둔다는 것은 자기 과시적이지 않고 스스로 낮추려는 겸손의 미덕을 나타내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대인관계에서 불손하거나 거만한 것과는 반대의 개념이다. 불손하고 거만하면 욕설을 듣기 쉽지만 겸손한 태도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칭송을 들을 수 있는 행동거지다. 그래서 노자의 장수비결은 자신을 위해 살려고 생명 활동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과 남의 뒤에 있으려고 하는 겸손한 태도라고 갈파한 것이다. 이와같이 덕을 갖는 것은 쉬운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누구든지 국민의 대표자를 염원하는 지식인들은 겸손한 태도로 불손하지 않으면서 공익적 삶에 신명을 바친다는 의덕(懿德)을 먼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노자는 세상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제국을 맡길 수 있다(He who loves the world as his body maybe entrusted with empire.). 덕을 돈독하게 간직한 이는 갓난아기에 비할 만하다고 했다. 갓난아기는 독충이 쏘거나 물지를 않고, 맹수도 덤벼들거나 할퀴지 않으며, 사나운 새도 덮치거나 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나운 동물도 덕을 갖춘 성인 앞에는 마치 갓난아기를 해치지 않듯이 유순해진다고 하니, 억지로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흉이라는 것이다.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는 2030년이 되면 지식의 총량이 3일마다 두 배로 증가해서 인간의 수명도 그 지식의 덕택으로 30년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이제는 백세시대가 아니라 천수(天壽) 시대가 올 것 같다. 그러나 유한한 수명을 갖는 인간유기체의 생물적 생명이 무기불사체(無期不死體)로 살아가는 세상이 어찌 올 수 있을 까 만은 사회적 생명은 영원히 장수한다고 하니 불로장생의 길은 오직 이 길이 아니겠는가. 거월(去月)에 일신(一身)을 스스로 화염에 불태우며 차세(此世)의 과업을 여한 없이 마무리 짓고 성불하신 총무원장의 사세(辭世) 불담(佛談)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야 없으나 그것은 온갖 방담이 세상을 소란하게 하는 작금(昨今)에 중생(衆生)들이 보라는 듯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현수막을 천공에 높이 펄럭이게 한 것 같다. 만물은 억지와 무리를 쓰면 쇠하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에 어긋나게 되어 망한다고 하니, 노자의 불로장생에 관한 가르침은 수많은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유통기한이 끝난 말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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