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졌지만 내 어릴 적만 해도 아침 식전이면 어김없이 대문 밖에 나타나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깡통 두 개를 손에 들고 가락을 넣어 ‘밥 좀 주소’ 소리를 치던 손님이 오면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어도 엄마는 그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밥 한 덩이, 김치 한 줄기를 깡통별로 담아 주었습니다. 그때는 우리집만이 아니라 웬만한 집에서는 다들 그렇게 나누어 주는 것을 심상하게 여겼습니다. 그 손님들에게도 그렇게 집집을 돌며 얻은 밥과 김치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고 우리들은 그 손님을 거지라고 불렀습니다. 동네 외곽에 허름한 빈 집이나 거적을 대충 얼기설기 얽어서 맨 거적집에 살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얻은 밥으로 연명하던 그들이 특별히 게으르거나해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해결해 줄 정부 차원의 복지가 부재했던 가난한 시대였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형편이 더 나을 뿐이었지 우리들이 풍족하게 먹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 집만 하더라도 자주 수제비나 국수로 끼니를 떼워 식량을 여투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못 싸와서 허기진 배를 수돗물로 채우는 아이들도 다반사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온 구호 곡물인 옥수수로 빵을 쪄서 학생들에게 배급해 주었고 그 빵을 기다릴 동생을 생각하면 혼자 먹을 수 없어 빈 도시락 통에 고이 담아 와서 동생과 나눠먹기도 했습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국내 굴지의 어느 회사가 사외이사들의 해외출장에 10여 명의 식비로만 1억원 대의 비용을 출장비로 지출한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떠오른 옛 기억의 한 장면입니다.   굶주림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먼 옛날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기 이전에는 굶주림은 일상적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공동으로 사냥한 짐승이라도 생길라치면 공동체가 함께 배부르게 먹었을 테지만 언제나 사냥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었을 터이니 그런 경우 다음 수확물이 생길 때까지 채집한 열매 따위로 배를 채우고, 계절이 그렇지 못할 때는 굶기도 다반사였을 것입니다. 그나마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먹고 남은 여분을 갈무리하여 배 곯을 일에 대비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도 대기근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하거나 전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 굶주림은 필연적인 결과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현종 때 발생한 경신대기근으로 조선 인구 1,600만 중에서 100만 명이상이 굶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에 조선에 닥친 이상 기후로 2년 동안 작황이 심각하게 나빠졌고 거기에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백성들이 심한 굶주림으로 가족을 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인 지옥도가 펼쳐졌다고 합니다. 19세기말 감자 역병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대기근은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나라를 떠나게 합니다. 미국의 경우 그렇게 이민자로 들어왔던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현재 독립국 아일랜드 인구의 몇 배를 넘는다는 통계가 있는 만큼 굶주림은 사회도 변화시킵니다. 역사상 기근이 원인이 되어 사라진 고대 문명도 있습니다.   잘못된 정책과 행정마비가 대기근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1940년대 영국 식민지 지배하에서 300만 가까운 아사자가 생겨난 벵골대기근이 있고, 유럽의 곡창으로 불리던 우크라이나에서 스탈린의 잘못된 정책이 불러온 대기근과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신양에서 100만이 넘는 아사자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가까운 1960년대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오늘날은 다행히 대규모의 아사자가 생기는 대기근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TV에서 가뭄 때문에, 전쟁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여 피골이 상접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후원할 기금을 모집하는 단체들의 광고를 보기도 합니다. 혹자는 그런 광고를 빈곤 포르노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굶주림은 아직도 엄연히 존재하고 굶주리는 아이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기후 변화로 먹이 구하기가 어려워진 어미 북극곰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새끼들을 거느리고 먹이를 찾아 헤매는 다큐 프로를 보며 새끼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할 의무를 진 무력한 어미와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를 속수무책으로 안고 있는 광고 속 아프리카 어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버려지는 음식물들을 보며 그것이 아까워 못 견디겠다던 어느 탈북민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에 굶주림이라는 말은 멀어진 단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세계는 하나의 큰 마을입니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같은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혼자 잘 사는 것보다 함께 살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입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