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금일)을 기준으로 지난 날은 어제(작일)이고, 다가올 날을 내일(명일)이라 한다. 수많은 시간(세월)을 보내면서 가장 명심되는 날인 기념일이나 추억의 날이 새로움을 느낀다.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리켜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추회라고도 한다. 추억은 기억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기억은 지난날을 행이든, 불행이든 잊지 않고 그 내용(일)을 외워두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마음의 저장고, 정신의 문지기라 하고, 모든 사물의 보배요, 수호자라 한다. 추억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억하지 못하면 만사가 헛사다. 그런 까닭에 기억을 종이에 쓰는 것보다는 마음에 써두라고 한다. 고대 희랍의 플라톤 학파의 작가요, 철학자인 플르타르크의 ‘영웅전’에, 영리한 아이는 기억하는 것이 빠르지만, 노력하고 애를 써서 배운 아이는 한 번 기억한 것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참고 견딘 일은 달콤한 기억이 되고, 모든 인식은 기억이 된다. 기억은 심리적인 폐허의 영역이며, 추억의 골동품이란 말도 있다. 영국 속담에 경험이 지혜의 아버지라면, 기억은 그 어머니라 했다. 한가지 불안스러운 것은 거짓말을 하려면,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고 하며, 채권자는 채무자보다 기억력이 더 강한 것이다. ‘논어’에 묵지란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마음 속에 기억해 두라는 말이다. 청년은 미래에 꿈(희망)을 둔다면, 장년은 현실에 출세의 꿈을 가지고, 노년은 과거에 추억을 그리며 산다. 과거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되지만,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그냥 그대로 둘 수는 없는 것이다. 과거와의 역사적 연속성은 의무가 아니고, 필요성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학자 알리스는, 어리석은 자는 말한다-‘나는 내일에 산다’라고, 현재에도 너무 늦다. 현명한 자는 과거에 살았다 한다. 과거에 경험 없이는 장래를 판단하는 방법도, 길도 모른다. 장래에 대한 최상의 예견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지혜에 있다.어느 날 필자는 철학서적을 탐독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과거는 과거로서 파묻어버려야 한다. 과거에 연연하고, 그 불만과 슬픔으로 현실을 덮지 말라. 이미 톱질이 끝난 톱밥을 다시 톱질할 수는 없다. 과거는 톱밥과 같은 것이다. 이미 끝난 일을 근심하고, 슬퍼하는 것은 톱밥을 다시 톱질하듯 소용없는 것이다.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에 힘쓰라는 것이다. 이미 흘러간 물로써는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님의 시야에는 하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은 허세에 가깝고 비생산적이다. 어제는 오늘의 옛날이고, 오늘은 내일의 옛날이 된다. 그러나 과거가 남긴 것은 오로지 추억 뿐이다. 어떻게든지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묻어버리고, 번영했던 시절에 겪은 유쾌하고 감미로운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의 자신 속에 있는 일이다. 지나가 버린 생활을 즐기는 것은 아름다운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먼저 나이를 먹으라한다. 장수의 비결은 맛있는 음식이나, 보약을 많이 먹는 것도 한 가지 묘약이지만 장수는 나이를 많이 먹는 데 있다. 사람이란 가장 보람있게 사는 마음의 자세는 무엇이든 감상적인 과거의 유물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시인이요, 수필가인 금아 피천득문인은,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했다면 비록 가난해도 유복한 사람이라 한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한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했다 하여도 감추어진 보물의 이름도 모르고, 놓아둔 위치도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롱펠로의 시(詩)에, 가까운 구름 뒤에/ 가려진 태양이/ 먼 들판을 환히 비추듯/ 추억은 먼 과거를 빛내준다. 그러나 즐거웠던 추억은 오래 남고, 고통스러웠던 추억은 더 오래 남는다. 괴롭다고 보았던 세상도, 지금은 더욱 그립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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