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 54-1번지에 가면 조선 전기 문신이었던 한확의 부인 남양홍씨의 묘가 있다. 부인 남양홍씨(1403~1450)는 이조판서 홍여방의 딸로 한확과 결혼하여 3남 6녀를 낳고 그중 막내딸이 수양대군의 며느리 즉 덕종(의경 세자)의 비(妃)이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 소혜왕후다. 한확(1400~1456)은 조선 전기 이조판서와 좌찬성, 좌의정을 지낸 문신으로 인수대비의 아버지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또한 그의 두 누이는 중국 명나라 영락제와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으니 중국 왕실의 처남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1417년(태종 17)에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1420년(세종 2)에는 예조참판 하연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 면제를 허락받고 귀국하는 등 중국과의 외교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단종 즉위년(1452년) 좌찬성이 된 뒤 그 이듬해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1455년(세조 1)에는 좌의정이 되었으며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6년에는 중국 왕실과의 교분을 앞세워 사신사로 명나라에 가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로 설득하고 허락을 받아냈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중국 명나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는데 큰 공을 세운 한확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가 묻힐 능지를 하사하였다. 그는 1456년 명나라에서 귀국길에 사하포(沙河浦)에서 객사하여 능지에 묻혔고 1470년(성종 1)에 세조 묘에 배향되었다.   한확은 왕릉지에 묻혔으나 부인 남양홍씨는 그의 유언 때문에 남편과 합장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사연인즉, 살아생전 국사 핑계로 평소 가정에는 무심한 남편이어서 불만이 많았기에 내가 죽으면 남편과 합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훗날 부인이 죽고 자손들은 어머니 홍씨의 유언을 무시하고 합장하기 위해 아버지가 묻힌 능내리로 가려고 하는데 상여가 꼼짝않고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본 여종이 마님의 유언을 얘기하자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명정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보니 따뜻한 기운이 느껴져 그 자리에다 땅을 파고 장사를 지냈으므로 한확은 조안면 능내리에, 부인 홍씨는 은현면 용암리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남양홍씨의 묘소 앞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유일하게 여성에게 내려진 신도비로서 인수대비가 세웠고 비문은 임사홍이 지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 불곡산(466.4m)에서 남남동쪽으로 뻗어 나간 지맥이 도락산(439.6m)을 일으키고 여기서 다시 남서 방향으로 지현굴곡을 하며 내려와 예원 예술학교를 지나 야트막한 현무봉을 일으켰다.    지금은 학교 건립과정에서 지기맥의 손상이 많으나 혈장에는 양쪽 선익과 전순 등 혈증들이 갖추어져 있어 생기 가득한 명당자리다. 묘소 좌우 청룡·백호도 혈장을 잘 감싸주고 정면의 안산은 그 모양이 여인의 눈썹과 같은 아미산이다. 아미산은 귀인을 배출하는 산으로 이 산의 영향으로 왕비(인수대비)가 탄생하지 않았나 하는 풍수적 해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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