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은 우리의 발을 보호하고 지지해 주는 역할을 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생활도구이다. 신발의 역할은 우리의 발을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우리의 발을 지지함으로서 평형을 유지하면서 걷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발을 편안하게 해 주는 역할도 제공한다.   옛날에는 신발을 통하여 신분의 차이, 빈부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가난한 평민들은 짚신을 신었고 부잣집 양반들은 비단신을 신었다. 더 가난한 사람들은 맨발로 다니기도 했다. 지금도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의 경제적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린 학생들조차도 유명 메이커의 신발을 선호하며 가끔은 학교에서 조차 분실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발을 생각하면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이 수복되어 피난길에서 돌아와서 아주 힘들게 살던 때 였다.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 뿐만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 사람들의 형편도 대동소이 했었다.   그 당시는 운동화도 없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고무신을 신고 다녔던 시절이었다. 남자는 검은 색 넓적한 고무신, 여자는 코고무신(앞부분이 코처럼 뽀족하다고 해서 우린 그렇게 불렀다). 그런데 난 여자 아이였음에도 남자아이들이 신는 검은색 넙적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어린 마음에 너무 싫었고 창피했다 엄마한테 싫다고 말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남자 고무신이 훨씬 튼튼해서 오래 신고 발도 편해” 확고한 대답에 두 말이 필요 없었다. 그 시절 우리는 부모한테 떼 써봤자 매 밖에 따라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두 번 다시 조르지 못했다. 하기사, 내 발은 넙적한 마당발이라 더 편한 것도 사실이었고, 여자용 고무신보다 질기고 오래 신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당시 초등학교 2 학년이었지만, 여자인 내가 왜 더 질기고 오래 신을 수 있는 남자용 고무신을 신어야 한다고 엄마가 고집하는 이유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여자 친구들은 물론, 특히 남자 아이들 앞에서는 너무 기가 죽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 시절에는 워낙 모두 가난했고, 그나마 공부는 좀 잘 한 편이라서인지 앞에서 노골적으로 놀려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 같아서는 분명히 왕따 시키고 학교도 다니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처럼 힘들게 살았던 시절을 이겨내고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풍요로운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언제 그처럼 어렵게 살았던 가를 기억에서 조차 가물가물해 진다. 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기억조차도 없는 과거이지만, 우리가 지금의 풍요를 이룬 밑바탕에 헌신한 기성세대에 대한 존경심만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독일로 갔던 광부나 간호사들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들, 월남전에 참가했던 군인들의 희생이 조국의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며,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냉수로 배를 채우면서도 자식들을 공부시켰던 부모님들의 사랑과 희생이 아니면 오늘의 풍요를 맛 볼 수 있었다. 오늘 아침 모 방송국 아침 프로그램에서 노인들의 노후자금 문제를 말하는 한 전문가의 강연을 들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자녀 1인당 양육비가 가장 많이 드는 나라라는 것이다. 교육비는 물론, 결혼시키는 비용에, 집 까지 마련해 주어야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노후자금을 마련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왜 이렇게 무리해 가면서도 사교육비며, 호화결혼식을 시킬 수밖에 없는 것일까? 바로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옛 날에도 냉수 마시고 이빨 쑤신다는 말이 있지 않았던가. 양반은 밥을 굶어도 육체노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핏 속에는 그런 유전적 요소가 흐르고 있는 것인가. 이제는 세상이 다 변했는데, 자식들의 머리속에도, 마음속에도 부모는 다 사라졌는데, 남의 눈치 보느라고 100세 시대를 살아야하는 자신들의 노후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부모의 사랑을 숭고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가치관의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지인과 같이 백화점에 갔다가 100만원이 넘는 운동화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믿겨지지 않아서 확인해 보려고 그 사람을 따라 백화점 매장에 갔다. 매장에 들어서서 점원에게 그 중 괜찮아 보이는 운동화가 얼마냐고 물었다. “190 만원 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 순간 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더니 “70만원짜리도 있어요” 하였다. 나는 서둘러 매장을 나왔다. 이미 몇 십 만 원짜리 기능성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은 주위에 흔하다. 그것도 과연 그 만한 가치의 기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터 인데 190만원짜리 운동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너무 놀라워하자, 같이 갔던 지인은 “돈이 많은 부자들은 그 정도는 비싸다고도 생각지 않아요” 하고 나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명품 백을 모시고 다니는 것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지만, 몇 백 만원짜리 운동화를 길에 신고 다니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그럼, 그 비싼 신발은 그 정도 가치의 기능을 가지고 신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요즘은 모든 것이 남의 눈치를 보는, 즉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 같다. 발이 편해야 몸이 편하다는 말은 맞는다. 발이 편하기 위해서 좋은 신발을 신는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백만 원짜리가 더 편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자기만족이거나, 남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신는다는 것은 모르겠지만… 참, 세상은 내 걸음으로는 따라 갈 수도 없이 많이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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