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이 닮고자 하는 롤 모델은 있기 마련이다.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필자의 경우,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에 비중을 둔다. 이런 연유로 예술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혼을 지닌 어느 여인을 존경하다 못하여 흠모까지 한다. 그녀는 연극인이다. 그를 단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오래 전 순전히 그녀의 연극을 통하여, 혹은 목소리로 매일 만난 적이 있다.   꽤 오래 전, 젊은 날로 기억한다. 그녀가 맡은 어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에서 애청자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주는 목소리에 반하여 열렬한 애청자가 되었다. 또한 당시 많은 량의 편지를 그 프로그램에 보냈다. 돌이켜보니 그 때 전파를 통하여 들려오는 애청자들 사연을 가슴으로 읽어주는 진정성이 크나큰 울림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어느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출연하여 예술인으로서, 또 잠시지만 정치인으로서 외도를 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는 것을 관심 있게 시청 했었다.   그 때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도 자신은 연극이 끝났을 때 멋진 남성이 문밖에서 기다리는 꿈을 잃지 않고 있다는 말이 그것이었다. 처음엔 이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당시 그녀는 이성에 대한 연정을 품을 가슴조차 메말랐을 지긋한 나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한 설렘을 저버리지 않고 있는 듯하여 뜻밖이었다. 그 나이에도 가슴만큼은 여전히 푸르고 뜨거운 그녀가 부럽기조차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이런 말을 입 밖에 꺼냈다면 자칫 정숙하지 못한 언행이 될지 모를 일이나 그녀 고백은 왠지 참으로 신선하게 들렸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지닌 아름다운 예술 혼 때문 일 것이다.   하긴 사랑엔 국경도 나이도 장애가 될 순 없다고 하잖은가. 어찌 보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누구나 그런 상상쯤은 가슴에 한번쯤 지닐법한 일이다. 이것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이란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랑은 더욱 빛나고 아름다우리라. 왜냐하면 남녀 간의 사랑은 전준엽이 지은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지고하여 인류사의 가장 중요한 중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엔 부적절한 사랑도 예술의 옷으로 당의정을 입히면 순수한 사랑으로 미화됨을 설명하고 있었다. 특히 고야의 예술 세계 내용에선 더욱 그것을 자세히 일러 주었다. 고야인 경우 어쩌면 사회정서, 윤리 따윈 인간이 만든 거추장스러운 울타리일 뿐이라고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하여 무언으로 항변 하는 듯 했다.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 고야(1746-1828)는 세인들의 따가운 이목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 행각을 회화로 승화하여 그것을 화폭에 옮겼다. 그가 그린 < 옷을 벗은 마하>와 < 옷을 입은 마하>도 이런 배경으로 그려진 걸작이라고 한다. 이 그림들이 미술사에 길이 남는 것은 침대 위에 도발적인 포즈를 취한 여체가 이제는 더 이상 외설이 아니어서만은 아니다. 이 그림을 필자도 익히 알고 있지만 <옷을 벗은 마하>인 경우 여체가 지닌 탄력과 이상적인 형태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침대 이불, 여인이 베고 있는 쿠션의 주름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는 게 매우 인상 깊다.   더불어 그림 속 주인공의 여체는 마치 고전미를 재현한 조각 같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배경과 빛나는 여체가 대비를 이루면서 심지어 차가운 분위기마저 자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체의 머리 위로 마주잡은 두 손은 액자 역할까지 하여 둥근 얼굴이 더욱 강조 되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 머리 쿠션의 오른쪽 모서리, 발을 꼭짓점으로 하는 역삼각형 구도는 역동적 느낌을 안겨줘서 그림 속 여인이 현실 여인임을 간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 실제 여인은 누구일까? 고야의 심장을 훔쳐간 그림 속 여인 정체가 매우 궁금하다.   ‘마하’는 스페인 말로 ‘멋쟁이 여자’이다. 여성의 음부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그림으로선 최초인 < 옷을 벗은 마하> 실제 모델은 알바 공작부인이다. 그녀는 1795년 고야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고야와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때 고야는 남편을 잃은 알바 공작부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헌신적으로 그녀를 돌봤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에 의하여 퍼진 이 염문설은 확실치 않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진위야 어떻든 고야는 유부녀인 알바공작 부인과 불륜설로 인하여 스페인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그 명성과 함께 멍에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당시 여성 누드는 신화적 존재로만 다룰 때였다. 그런 까닭에 현실적이며 에로틱한 분위기를 표출하는 < 옷을 벗은 마하> 때문에 종교 재판소로부터 그림을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 일로 고야는 외설 작가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랑의 화석인 고야 그림인 < 옷을 벗은 마하>만은 시대를 거슬러 당당히 예술이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우리들 앞에 현재도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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