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다’는 낱말은 ‘빛깔이 스미거나 옮아서 묻다’란 뜻을 가집니다. ‘물’은 빛깔 또는 색을 가리키는 순우리말입니다. ‘봉숭아꽃물을 들이다, 얼굴이 발갛게 물들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다’처럼 쓰이지요. 이렇게 보니 ‘물들다’는 참 아름답고 낭만적인 말입니다. 저녁 산책을 갔다가 문득 서쪽 하늘을 물들여가는 노을을 만납니다. 방금 해가 넘어간 서쪽 하늘은 부끄럼 많은 소녀의 볼처럼 발갛지만 점점 짙붉은 색에서 보랏빛을 지나 짙은 잉크색이 되며 천천히 어둠에 물들어갑니다. 그럴 때 하늘에 뜬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김광균의 시 ‘데생’에서 인용)’를 피웁니다. 이런 장면과 함께 떠오르는 낱말인 ‘물들다’나 ‘물들이다’의 어감은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수 년 전 갔던 울릉도 여행에서 화려하고 장엄한 저녁노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천부성당 마당에서 별 생각 없이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 펼쳐진 저녁노을은 아마도 두 번 보기 어려울 감동으로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을 낙인을 찍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난 하늘에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잠깐 사이에 노을은 불타는 화염이 되어 바다도, 하늘도, 구름도 이글이글 불타는 빛깔로 물들이고 언덕 아래의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민가의 지붕들도, 먼 수평선 위 저녁 조업 중인 배들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물들다’는 낱말은 또 ‘어떤 환경이나 사상 따위를 닮아가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세속에 물들다, 나쁜 환경에 물들다, 악에 물들다’처럼 사용되는데 이 경우는 비교적 부정적인 함의로 담고 있는 편입니다. 하나의 낱말이지만 쓰임에 따라 이만큼이나 차이나는 느낌을 불러일으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얼마나 많이 물들고, 물들이며 살까요? 20, 30대의 젊은 시절까지는 아마 대개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물이 들면서 살다가 중년 이후 생의 후반기가 되면서는 자신이 주변을 물들이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양육하는 부모에게서 시나브로 물이 들며 가치관과 습관을 만들어갑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양육자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피양육자인 아이에게 스며들어 전해지고 그걸 몸으로 체득하며 배운 아이는 올바른 말과 생각과 행위를 닮아 제 것으로 만들어갑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부모는 의도하지 않아도 아이를 어둡고 부정적인 빛깔로 물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렇게 체득한 것들에 살아가면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들이 더해지며 아이는 어른이 되고 이제 그 자신이 주변 사람들을 물들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인간은 사회 속에서 배우고 습득하며 살아가는 존재니까요. 일전에 야당 대표가 흉기로 피습을 당하더니 그저께는 또 여당의 국회의원이 돌로 머리를 가격당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당 의원을 공격한 피의자가 겨우 10대의 남자 중학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미성년자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것도 배움의 한 영역이랄수 있지요. 그러나 보도된 사건을 보며 그는 정치를 배우기도 전에 사회로부터 증오심을 먼저 배우고 증오에 물들어 버린 건 아닐까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남녀는 남녀별로,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빈부는 또 그대로 나누어져서 화합이나 조율보다 증오와 대립이 우선하고 있으니 그런 사회 분위기가 어떤 물을 들일지는 명약관화하지 않을까요? 선한 물이 든 사람이 선한 물을 들일 수 있습니다.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들이 모인 집합체입니다. 그러니 사회가 선한 영향력을 가지려면 먼저 개개의 ‘나’들부터 적대감과 증오를 버리고 이해와 포용이라는 선함에 물들어야 합니다. 기성세대의 뒤를 밟아오는 젊은이들에게 자기와 다른 의견도 귀 기울여 듣고 합리적 대화를 할 수 있는 큰 마음으로 물들이려면 ‘나’부터 그런 빛깔이어야 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문득 내가 디딘 발자국들은 주변에 어떤 물을 들이고 있었을지 돌아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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