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시간째 흰나비 떼 날갯짓이 계속 되고 있다. 향기도 빛깔도 이미 잃은 회색빛 겨울 대지 위에 사뿐히 내리는 저 순수의 수많은 나비, 마치 꽃들의 부활마저 꿈꾸는듯하다. 얼음을 비집고 얼굴을 내민 노란 얼음색이 꽃잎, 그것에 흰나비들 입맞춤이 끝나면 희망의 봄은 머잖아 우리 곁을 찾아오려나.   봄을 향한 흰나비들 순백의 몸짓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겨울은 아직도 음울한 낯빛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온 세상 추醜와 악惡을 덮을 양 흰 눈은 내려 온 누리에 소리 없이 쌓인다. 정갈한 자태의 흰 눈이 내릴 때마다 그것을 바라보노라니 가슴 아린 추억에 눈가가 젖는다. 한 때는 사랑이 전부인 적이 있었다. 그땐 별표 전축,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집, 그리고 그 머슴애만 있으면 더 이상 소망이 없노라고 장담했었다. 하늘이 회색빛으로 낮게 내려앉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 머슴앤 쓸쓸한 표정으로, “ 네가 그리울 땐 편지를 쓸게.”라는 이 말 한마디 마지막으로 남긴 후 훌쩍 외국 이민 길에 올랐다. 그 후 내 망막에 회색빛 하늘이 비쳐질 때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중 ‘얼어붙은 눈물’을 입 속으로 나직이 따라 부르곤 했었다.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 라는 생각 때문일까. 이렇게 흰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는 그 애에 대한 그리움에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이 나이에 웬 사랑 타령일까. 이젠 ‘사랑에 빠질수록 혼자가 되라’ 라는 릴케의 시어를 새삼 음미할 나이에 이르렀잖은가.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엔 혼자일 수가 없었다. 동병상련의 주옥같은 글이 내 가슴에 젖어들어서인가. 박영자 수필가가 지은 『햇살 고운 날』이란 수필집을 손에 들고 필자는 아름다운 필력에 매료 되고 사랑앓이에 공감이 돼 그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 책 저자는 수필집 『햇살 고운 날』에 수록된 「겨울 나그네와 인연」이라는 작품에서 젊은 날 이루지 못한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과 남편을 만나 결혼에 이르기까지 사연을 잔잔한 문체로 아름답게 표현 하였다. 지난날 베트남전이 치열할 때 한 남자를 전쟁터에 보내고 혼자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전쟁터에 사랑하는 님을 보낸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사랑 한다’라는 말조차 변변히 주고받지 못하던 사이였단다. 그럼에도 막상 전쟁터로 그 남자를 보낸 후, 향한 그리움이 사랑임을 확인했다고 하였다.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에 꽃처럼 매단 채 그 꽃에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가꾸었으리라. 반면 인연은 항상 엉뚱한데서 맺어지나보다. 같은 학교 동료인 어느 여교사가 전에 선을 보았던 남자와 우연히 마을 다리에서 스친다. 오버 깃을 세우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마주 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그가 왠지 겨울 나그네 같이 고독해 보였음은 가슴 깊게 드리워진 옛 사랑 그림자 탓이었을까. 아님 새로운 사랑 그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연민이었을까. 아마도 그 남자가 복수 초에 내려앉는 흰 나비 같은 존재였음을 이미 그때 예견 했었는지도 모른다. 훗날 박영자 작가는 그 ‘겨울 나그네’ 같았던 남자와 결혼을 하였으니 남녀의 인연이란 역시 억지로는 아니 되는 법, 인생사엔 숙명도 적잖이 작용하는 듯하다. 이 수필을 읽고 옛사랑이 불현듯 그리워 밖을 나섰다. 지상으로 낮게 몸을 뉘이던 무수한 흰 나비 떼가 내 안으로 수없이 날아와 그리움으로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