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저명한 작가 `마크맨슨`이라는 사람이 최근 우리나라를 여행한 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했다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벼락출세를 했거나 유래 없는 불황 속에서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특정 그룹의 사람들이야 동의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쩌다 이토록 우울한 나라를 만들게 되었을까?   생물학적으로 조숙(早熟)하는 동물이 조로(早老)하며 수명이 짧다고 하는데, 경이로운 경제성장으로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라는 불명예와 찢어진 가난의 굴레를 조기에 벗은 것이야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그간 우리가 이룬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직업이 불안하고 생계가 불안하며, 사회 안전이 불안하고 안보가 불안한 것도 원인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실종되면서 외로운 행성에 나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고립감이 허기짐보다 더 무서운 공포로 다가온다.   개인적인 우울증이야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 요인 등 복합적 원인을 생각할 수 있겠고 적정한 의료조치가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집단적 우울증은 순전히 사회적 환경이 그 원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료조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고 무슨 말도 믿을 수 없는 사회, 개인 간의 약속이든 공약(公約)이든 약속은 곧 미래의 상황에 대한 계약이며 보증이라 할 수 있다. 무슨 약속이든 간에 공동체가 운영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약속이 지켜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약속을 영어로는 Promise 라고 하는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접두어인 pro는 미래를 의미하고, 접미어인 mise는 `보내다`라는 의미의 고대 라틴어인 mittere에서 찾을 수가 있다. 따라서 promise는 미래에 대한 상황을 예측한다는 미래지향적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인 것이다.   때문에 약속(promise)은 곧 미래에 대한 보장이자 희망이 되는 것인데, 아무런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 사회에서 미래의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고, 희망을 상실한 상태가 곧 절망인데,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한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절망은 사람들을 가장 우울하게 만들어 결국은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내가 당신과 언제 만나자는 것은 시간약속이지만, 당좌수표나 어음은 개인 간의 지불약속이 된다. 그러나 법(法)이라는 것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지켜야 하는 공공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인데, 너는 지켜야 하지만 나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거나, 이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고, 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이 다르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찌 법이라 할 것인가!   법이란 원시시대 인간이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래 자연 발생된 너와 나의 약속이었겠지만, 인간이 문자를 가지면서 굳이 성문화(成文化)한 이유는, 보편타당한 표준을 기록해 둠으로써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인데, 이는 마치 우리가 표준시(標準時)를 약속하고 길이를 표준화한 자(Ruler)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주장의 다툼을 피하기 위해 명시해 놓은 법을 놓고 법리다툼은 무엇이며, 법 집행자의 주관과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법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 같은 무지랭이가 무얼 알까마는 굼벵이도 밟히면 꿈틀거리고 벙어리도 날벼락을 맞으면 비명은 지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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