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된 기억입니다. 첫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첫 날 시어머니께서 소반 하나를 받쳐 들고 아기와 내가 자리를 깔고 누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아직 첫 이레도 안 지난 아기를 뉘어놓은 머리맡에 내려놓은 소반에는 맑은 물이 담긴 대접 하나가 놓였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내게 아무 설명도 없이 소반 앞에 꿇어앉은 어머님은 손을 비비고 입을 달싹이며 뭔가를 빌었습니다. 아마 아기가 아무 탈 없이 잘 자라도록 삼신할미에게 치성을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첫 이렛날이 될 때까지 새벽이면 아기 머리맡에서 어머니는 경건하게 의식을 치렀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객지에 나간 자식이 있거나 집안에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으면 이른 새벽에 깨끗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그렇게 빌었더랬지요. 멀리 있는 자식이 몸 성히 있기를, 아픈 이는 쉬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를 손을 비비며 기원했겠지요. 종교를 찾는 것도 대부분 그런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절대자에게 나의 괴로움을 온전히 봉헌하고 의지하여 그 아픔을 위로받고 어려움을 이겨나갈 힘을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오랫동안 서민들에게 무속신앙은 치유와 위로를 구하고 소망을 절대자에게 빌어 전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입니다. 마을마다 오래 묵은 나무를 신수(神樹)로 모셔 오고가는 이들이 소망을 담은 돌을 던져 쌓은 서낭당이 있고, 거기에 따로 당집을 지어 모시기도 했습니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인 시베리아, 티벳, 신장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와 각색의 천을 나부끼도록 묶어둔 ‘오보’ 역시 우리의 서낭당과 같은 기원을 가졌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 혹은 몽골족의 ‘텡그리’란 말에서 유래한 낱말인 ‘당골’이라고도 불리던 무당은 신의 중개자가 되어 필요로 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복을 빌고 한을 풀며 잡귀를 쫓아내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에 맞닥뜨리면 절대적 존재에게 기대고 하소연하고자 하는 본태적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무속신앙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여기에 기대고자 하는 사람도 아직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정비로 많이 사라졌지만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남산의 큰 바위 아래나 바람이 피해갈 만한 아늑한 바위틈에서 타다 남은 양초 토막을 발견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산신을 찾은 누군가가 남겨놓은 기도의 흔적이었겠지요.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바닷가도 용왕님을 찾아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경을 외는 사람들을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 용(龍)이 되겠다며 동해 바다에 자신을 묻으라는 유언에 따라 수장한 곳이 문무왕수중릉입니다. 그래서인지 문무왕릉 앞의 바닷가가 신(神)발이 아주 용하다고 소문이 나서 시나브로 굿당이 여기저기 들어서서 이로 인한 폐해도 크다고 합니다.   사적지인 문무왕릉은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관광객 중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에서 행해지는 무속 행위에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점은 굿을 하고 난 뒤의 쓰레기가 해변 여기저기에 함부로 버려져서 사적지 주변을 더럽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관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설물인 비닐하우스 굿당들이 주변 경관을 해치고 사적지를 찾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탁 트인 푸른 바다는 세사에 시달린 마음에게 기대어 쉴 곳이 되어줍니다. 그런 이들은 여기저기 설치된 가건물 굿당과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휴식을 방해하고 기대어 쉴 곳을 빼앗는다고 아쉬워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편으로 무속 행위에 기대는 이들도 그들 나름의 간절함을 위로받고 아픈 마음을 달랠 방편으로 용하다는 기도처를 찾아 굿을 하고 치성을 드리겠지요. 그런 마음을 백안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굿은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 한 형태니 이를 살려서 관광자원으로 쓰자는 의견도 없지 않습니다. 단지 여기저기 남발하여 지어놓은 불법 설치물들과 굿을 하고 난 잔재물을 치우지 않고 방치하는 행위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문무왕릉은 부근의 감은사지, 이견대와 연계하면 신라의 화랑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사적지가 될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곳까지 동해의 물길이 연결되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설화가 있는 감은사지와, 힘을 도와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장군과 문무왕이 죽어서도 나라를 걱정하여 신비한 대나무를 내려 만파식적을 만들어 적을 물리치도록 했다는 설화를 품은 이견대를 연계하고 음성적인 굿당들을 양성화하여 삼국유사의 정신과 전통 문화를 아울러 체험할 수 있는 관광지로 정비하는 것은 어떨까요? 굿과 같은 무속 행위가 어떤 이들에게는 마음의 위로와 치유를 얻는 쉴 터가 되기에 단속과 정비에도 불구하고 재개되고 다시 설치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주시의 문화재와 관광을 담당하는 부서는 무조건 철거하고 소탕하기보다 민속 문화로서의 굿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되 무속 행위의 공간과 일반 관광객의 공간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도록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재정비하면 관광에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게 푸르고 광활한 동해 바다가 어떤 이에게는 설화를 품은 공간으로 멈추어 쉴 곳을 제공하고, 아울러 어떤 이에게는 간절한 바람을 호소하여 아픈 마음이 기대어 위로받을 공간이 되어 주기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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