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은 집안 공기를 맑고 신선한 공기로 순환 시켜준다. 또한 창을 통해 활기차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명랑함을 잃지 않기도 한다. 눈 오는 날 함박눈을 볼 수 있는 것도 창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창은 아름다운 정경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끼게 해준다.   창을 열어놓고 있는 여인이 창호지 이야기를 꺼냈다. 창호지를 새로 바르면 신세계가 열린 듯 밝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자신이 신선이 된 느낌이었다며 유년 기억을 전해줬다. 필자도 창호지를 바를 때 코스모스, 붉은 단풍 등을 함께 발라놓으면 창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창은 어두운 내부와 밝은 외부를 연결 시켜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투명한 창을 통해 세계로 나갈 수 있고 또 돌아와 존재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러움과 생명의 고귀하고, 고유함을 깨달을 때만이 창 바깥에 있는, 자신 앞에 발견된 대상과 마주할 수 있다.   외부로 열려있는 우주로 향하는 삶은, 앞에 세움만이 아니라 세속에서 벗어나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내맡김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삶을 확장 시켜준다. 함께 속해 있음, 즉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 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이제 창窓을 열어 공기空氣를 밖구어 드려야할텐데 밖을 가만이 내다 보아야 방房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윤동주, 「돌아와보는밤」 전문 「돌아와보는밤」에서 “창”은 외부와 연결되어 하늘과 땅에 대한 가치를 연결하여 종교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창”을 통해 우주와 연결된 윤동주 방은 현실에서 멀어지고 자신의 내면세계에 머물고 있는 공간이 아니다. 우주로 열려있는 “창”은 시간 흐름 위에 있는 한 지점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함축된 존재함에 대한 의미를 드러나게 하여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방이기 때문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것은 “피로롭은 일이”다. 이 피로를 풀 수 있는 포근한 방은 어둠 속 고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윤동주가 접한 세계는 “비를 맞고 오던 길”로 춥고 쓸쓸한 현실의 길이다. 아직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다.   날이 새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 현실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젖어 있는 길은 아직 어둠 속에 있다. 하루를 쉬게 하는 것은 어둠이 감싸 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어둠에 감싸 안겨질 때 길은 내면화된다. 때문에 켜져 있는 ‘불을 끄게 함’은 어둠을 맞아들이는 행위로 재생을 위한 ‘행복한 공간’ 만들기가 된다.   이때 찾아진 행복은 고통으로부터 도피가 아니다. 무의식을 통합하여, 밝은 낮 세계를 조명하려는, 사방으로 트인 자유로운 만남을 예비하는 행복이다. 바라보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는 세상 바라보기 역설로 어둠은 존재하고 있다.   눈감음은 분함에 대한 내면화이다. 분함을 내면화 시켰을 때 고통은 성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분함은 “능금”로 바뀌어 성찰되며, 성찰은 내면화를 통해 자기를 완성하는 길로 안내한다. 때문에 집은 외부로부터 돌아온 집이 된다.   그녀 또한 자신과 싸움에서 패배하여 하얀 사각 방에 갇혀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외부에서 돌아와 창을 열고 세상을 내다보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성찰을 내면화 단계로 이행시키기 위해, 현실이 주는 고통을 성찰로 이끌기 위해 산을 오르고 새와 소통하고 식물과 친구 되어 오늘도 걷고 있다 한다. 분함이 “능금”으로 바뀐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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