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 나이지리아 소설가 월레 소잉카가 경주에 다녀간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왜 경주에 왔던 것일까. 그들은 2012년 경주에서 열린 제78차 국제 펜 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경주 땅을 밟았다. 당시 경주에는 국내외 문인 1000여명이 방문했다. 한국 현대문학을 이끈 동리와 목월의 고향인 경주에서 열린 최대 문학행사였던 것이다. 당초 이 대회는 제주도에서 열리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의 문인들이 전통적인 문향인 경주에서 개최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내 마지막으로 경주로 확정됐다는 얘기도 전한다. 아무튼 이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자 경주시에서는 국제 펜 세계대회 기념도서관인 문정헌을 지어 문학도시 경주의 상징으로 삼기로 했다. 경주 대릉원 북문을 나와 도로 하나를 건너면 규모는 작지만 세상에 둘도 없을 아름다운 도서관인 문정헌이 나온다. 비록 담장에 가려 있지만 문정헌 앞에는 대릉원이 버티고 있고 뒤쪽으로는 노동리 고분군이 둘러싸고 있다. 외국인이나 외지의 방문객이 경주를 방문했을 때 하나같이 감탄하는 고분들이 문정헌을 중심으로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도서관은 수만권의 장서와 자료를 보관하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 수 있을 정도의 제대로 갖춰진 규모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의 역사적 층위와 규모가 압도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 만들어져야 할 도서관도 그것에 필적할 만한 기능과 규모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정헌은 그런 일반적인 개념의 도서관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처음 열린 세계문학대회를 기념하고 그 의미를 오래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그 규모나 기능을 넘어서 건립의 상징적 의미를 깊이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문정헌이 헐릴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린다. 경주 대릉원 일원 사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문정헌이 조만간 철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정헌이 문화재 지구에 속한 철거 대상 건물이므로 3월 문정헌 인근의 법장사를 매입한 뒤 문정헌도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경주시의 입장이다. 도대체 이건 무슨 소리인가. 경주시의 입장이라면 법장사와 문정헌의 존재는 문화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문화재는 계승, 발전, 상속할 만한 것으로서 고고학, 역사학, 예술, 과학, 종교, 민속, 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법장사와 문정헌은 그러면 과연 이 정의에서 벗어난 것인가. 역사적으로 고증되지 않은 것들도 스토리를 입혀 보존하고 상속하는 사례는 외국에서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다. 법장사는 건립된 지 200년이 넘었고 유일한 도심의 사찰이다. 그리고 포교 중심의 사찰로 그 기능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리고 그 한쪽의 문정헌은 세워진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문화도시 경주의 매우 상징적인 기념물이다. 그것을 허물겠다는 대릉원 일원 사적 정비사업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21년 4월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의 작은 도서관 문정헌의 활성화를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김성춘 국제펜 한국본부 경주지역 위원장에게 약속한 적이 있다. 주 시장은 김성춘 위원장에게 “경주시의 문화발전을 위해 문정헌이라는 공간을 활성화하는데 경주펜이 앞장선다면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3년도 지나지 않아 그 약속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과연 그래놓고 경주를 문화의 도시라고 말할 염치가 있는지 묻고 싶다. 제78차 국제 펜 세계대회를 개최한 저력을 인정받아 국제 펜 한국본부는 광역자치단체에만 부여하는 지역위원회를 경주에 설치하도록 했다. 그래서 경주시에는 기초단체 중 유일하게 지역위원회가 조직돼 있다. 그 후 경주지역위원회는 지난 2015년부터 세계 한글 작가대회를 6회째 개최했다. 매년 경주시에서 1억원을 내놨고 경상북도에서 1억원을 보탰다. 그리고 6회를 진행하는 동안 45억원의 국비를 유치해 이 대회를 끌고 왔다. 그러다가 지난해 이 대회를 광주광역시에 넘겨주고 말았다. 경주시에서 이 행사를 위한 시비 1억원을 편성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글과 한국 문학의 위상, 이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의 가치에 대한 숙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국제적인 문학행사를 광주에 슬그머니 빼앗기더니 이제는 더없이 소중한 경주의 문학 자산인 문정헌도 철거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경주시민들은 도대체 왜 입을 닫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러고도 국제적인 문화관광도시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경주시는 문정헌과 법장사가 대릉원 일원 사적 정비사업에 왜 걸림돌이 되는지 문화재 관련법으로만 설득하려 들지 말고 정서적으로, 시민들과 문화인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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