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 개인적으로는 퍽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2월인가부터 얼마쯤 걸으면 갑자기 오른쪽 좌골에 심한 통증이 왔고 잠깐 주저앉았다 일어나면 거짓말같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다시 걸으면 아픈 그런 증상이 반복이 되더군요. 병원에서는 ‘파행’이라고 하며 허리디스크가 조금 비어져 나와서 그러니 운동만이 해결법이라고 했습니다. 완치는 아니어도 그만저만하며 지나다가 9월에 넘어져서 발등뼈가 쪼개졌습니다.    깁스 처치를 하고 시간을 보내니 그냥저냥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될 무렵 또 허리디스크 탈출이 심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골반 뼈에 금이 가 결국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활동 범위로 집안이나 병원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야외 활동을 할 수 없으니, 그다지 야외 활동을 즐기지 않던 편이었지만 답답하고 우울해지면서 바깥 활동이 정말 그리워지더군요.   무엇이든 잃고 나면 그 소중함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쓰이지 않아 저만치 치워두었던 물건도 없어지면 그것이 필요한 곳이 더 생깁니다. 지금에사 홀가분한 2인 생활에 길이 들었지만, 오래 전 고교를 졸업한 큰 아이가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크고 휑하던지. 새벽같이 등교하고 야간자습으로 자정 무렵이 되어야 귀가하니 집에서는 거의 잠자는 모습만 볼 수 있다가 새장을 떠나 이소하는 새처럼 아이는 자기 세상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아이의 부재를 인정하는 데는 한 학기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습니다.   건강 또한 더욱더 그러하군요. 행동이 자유로울 땐 미처 인식하지도 않고 살던 건강에 흠이 생기니 몸의 불편함은 물론이거니와 불안이 마음을 잠식했습니다. 그런 시간이 점점 이어지니 ‘앞으로 걸을 수 없게 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여름날의 뭉게구름처럼 피어났습니다. 일상의 사소한 루틴들, 예를 들면 강아지와 아침 산책하는 일, 마트나 시장에 걸어가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 일, 청소나 식사준비같은 집안일 따위를 챙길 수 없으니 생활의 불편함은 물론이고 주부로서의 자존감조차 낮아지더군요. 돌아보니 건강한 일상이 주는 소소한 기쁨을 모른 채 살고 있었더군요.   다행히 봄이 되니 몸 상태가 좀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젠 휘청이면서도 짧은 바깥 산책을 합니다. 집 안의 공기에 갇혀 있다가 집 밖으로 나와 향기로운 봄 공기를 흠뻑 폐 속으로 불어넣습니다. 농사 준비로 갈아엎은 논바닥 흙덩이에서 거칠지만 우직한 흙냄새도 맡습니다. 길가 여기저기에 재빨리 꽃을 피운 잡초조차 아름답습니다. 한바탕 바깥기운을 쐬고 돌아오면 줄리언 반스의 에세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 심노숭의 ‘자저실기’ 등의 책을 앞에 펴놓은 휴식이 소소한 기쁨을 줍니다.   있을 때는 자신이 가진 것의 귀함을 모른다고들 하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걸음’은 다리를 가진 중생이라면 당연히 가질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내 걸음 걷기가 힘들어지니 비로소 눈이 뜨입니다. 보행을 돕는 보조기구에 의지하게 되니 스스로 걷는 자유가 결여된 몸의 무게는 엄청난 장애가 됩니다. 언론 보도로 서울 지하철 역에서 벌이던 장애우들의 시위를 보면서도 덤덤하던 몇 달 전에 그때에 비해 내 눈높이가 달라지며 그들의 주장을 공감하는 마음으로 되새기게 됩니다.   겪어 본 바 보행 장애가 있는 사람이 외출하려도 교통수단인 탈것들은 그림의 떡입니다. 그나마 몇 대 안 되는 저상 버스를 타지 못하면 그 외 버스들은 휠체어를 타고 오르기에 승강구는 너무 높습니다. 장거리를 가려니 ktx 열차도, 시외버스도, 지하철역의 가파른 계단도 모두 보행에 장애가 있는 이들을 소외시킵니다.    두어 달을 보행이 어려워 휠체어도 타고, 보조기구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어 보니 비로소 장애를 가진 이들의 불편에 눈이 뜨입니다. ‘장애’를 장애가 되게 하는 것은 사회의 인식이라는 것도 보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몸의 불편함이 장애가 되지 못한다는 인식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존귀하다고 믿는 그 사회의 노력이 만든 결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불편함의 경험이 그 동안 보려고 못해서 알지도 못했던 그들의 불편을 볼 수 있게 하니 나도 눈을 뜹니다.   봄은 누구에게든 골고루 찾아옵니다. 누구나 설레어 밖으로 나가고 싶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고〉 싶기도 합니다. 봄을 누리는 데 장애가 제약이 되지 않도록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이가 눈을 좀 더 크게 떴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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