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경이 고등 입시 시험 발표날, 우리는 전화기 앞에서 초조한 생각에 잠겨 소식을 기다리던 중 마침 신호가 울려 들어니 시험에 합격했다는 전화였다. 몹시 반가웠다. 평소엔 예사로 생각했는데 안 당해보면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저녁 후 콜라 2병, 과자 1000원어치를 싸주었다(맞춤법이 틀린 곳이 있으나 일기에 쓰인 그대로 옮겼다)’ 1980년 초반 대구시 권역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치른 나의 합격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심경을 적은 아버지의 일기다. ‘콜라 2병과 과자 1000원어치’라니...,피식 웃음이 났다. 당시 물가가 짐작됐기 때문이고 아버지 기쁨의 한도치곤 너무나 소박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용 보다 진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콜라와 과자였으리라.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3년여 전 가을, 83세의 일기로 가족들의 오열 속에 순하디순한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그리 살가운 편은 아니었던 아버지였지만 책임감 강하고 무척 성실한 분이었다.누구보다 애절하게 슬퍼하셨던 어머니와 우리 3남매는 가까운 절에 49재를 올리는 것으로 아버지를 잘 갈무리해 떠나보냈다고 서로를 토닥거렸다. 고향집에 남겨진 아버지의 유품들 중 수십 년간 써 오신 일기장 속 주인공은 그렇게 영원히 마주할 수 없는 고인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달 전 이었던 것 같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하루가 달리 쇠약해지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곧 다가올 아버지의 ‘부재’를 예감했다.   그러던 중 돌아가시기 3일 전이었을까. 우리 3남매는 우연히 낡은 서랍 몇 칸에서 30권이 넘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됐다.    대략 1980년대 초부터 2015년까지, 35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던 일기는 아버지의 기력이 완전히 쇠해진 시점에 멈췄다. 아버지의 삶의 기록이자 자화상에 다름없었다. 대학 노트 크기의 두툼한 일기장은 매년 새로운 일기장으로 교체된 듯했다. 일생 포도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는 길거나 짧은 매일의 상세한 농사 일지는 물론, 어머니와의 가벼운 다툼부터 애틋한 부부애 표현까지, 친구나 지인들과의 관계, 당신의 예민하고 까탈스런 성품에 대한 고뇌와 반성, 우리 3남매의 입시와 결혼, 손주들의 탄생까지의 성장 일지를 고스란히 기록해 두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 느낀 일상의 진솔함, 고된 농사일을 묵묵히 함께 견뎌내며 인생의 고락을 함께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자식들에 대한 애틋하고 무한한 부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특히 꼬박꼬박 그날그날의 수입과 지출을 적고 지출엔 빨간색 볼펜으로 ‘밑줄 쫙’ 그어놓으셨다. 일기장 속 아버지는 청춘이었다가 자식 셋을 결혼시키는 중년이 되었다가 ‘오늘도 별 할 일 없었다’는 노년을 맞이했다. 정자체로 쓰인 날렵하고 강건했던 필체는 점차 힘없이 흐트러져갔고 불규칙적이면서 내용도 짧고 단순해져 갔다. 치매 증상과 맞물린 여러 합병증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급기야 돌아가시기 3년 전 즈음 일기는 멈춰버렸고 우리는 그 대목에서 가눌 길 없는 슬픔과 마주했다. 성실한 농부의 표상으로, 3남매의 아버지로, 어머니의 지아비로, 어떤 가식도 포장도 없었던 글들은 아버지의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 그대로였으나 때론 놀라운 수사(修辭)력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유독 자주 고뇌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수없는 ‘각오’들을 반복했었던 것 같다.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지만 아버지도 그러했던 것 같다. 지금도 혼자 남겨진 어머니를 찾아뵈러 가는 고향집에서 아버지의 유품들과 함께 보관돼있는 일기장을 뒤적여 보곤 한다. 그리운 아버지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일기장이 밝혀지는 것을 원하셨을까. 먼 훗날 다시 만날 아버지에게 여쭤보고 싶다. “아버지 우리가 일기 보는 거 원치 않으셨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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