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촌은 거대자본이 지배하는 매우 거칠고 빠르게 속물화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반해서, 사회 구성원마다 ‘인간다운 삶’을 바라는 욕구 또한 강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다운 삶’을 달성하기 위하여, 과연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국가 차원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은, 고용의 완전함과 최상의 복지 실현을 달성하는 일이 되겠다. 세계화 시대에는 이것을 나라 단위의 재정정책만으로 달성하는 일이 쉽지 않은 터, 국가가 이러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려면 ‘누적된 정치 자산’과 ‘신뢰받는 정치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반세기를 넘는 분단체제 하에서 형성되어 온 우리 사회의 정치 환경은 다분히 분열적이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보다 권력 장악을 오히려 우선시하는 분열적 정치 환경이, 최상의 복지국가를 가능케 하는 진보적 정치 환경으로 일거에 변화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조금씩조금씩 건강한 정치자산을 쌓아가면서 정치 환경을 진보적인 모습으로 바꿔 나가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다. 이러한 노력의 출발점은 아무래도 ‘지역’에 있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지방자치제가 더디게나마 발전해 온 과정을 볼 때 그렇다. 교육감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 주민들의 의사결집능력이나, 정당 공천의 타당성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 사례들이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에 순응하는 듯 했던 지역 주민들은, 이십년 지방자치 진행과정에서 갈수록 정치적 자각을 하게 되었으며, 담아 두었던 정치적 욕구를 분출하고 스스로 실현해내고 있다. 이제 지역 정치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새로운 지역 세력의 형성을 가속화할 때다.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경제와 정치의 첫걸음을, ‘지역’에서 떼자.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틀을 짜고 국가적 정치 환경을 진보하게끔 만들자. 지금 생산의 지역 간 격차는 극심하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산업부문과 여타 산업의 격차는 외환위기 이후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시기부터 울퉁불퉁하게 성장해 온 지역경제는, 바로 이러한 산업간 격차 때문에 더욱 불균등하게 성장하고 있다. 교육비 지출의 지역격차도 더욱 커지고 있다. 지식산업이 미래 성장 동력이라고 전제하면, 교육의 지역 간 격차는 생산의 지역 간 격차를 증폭시킬 것이다. 이는 나아가 생산과 복지 모든 면에서 지역 간 격차를 구조적으로 증폭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이 새로운 경제가 만들어지는 공간(space)으로서 그 위상을 찾지 못한다면, 어느 사이에 지역은 소멸되고, 국가는 오로지 거대자본의 경제논리에 의해 좌우될 지도 모른다. 완전고용과 최상의 복지 실현을 달성해 가는 복지국가의 정치적 이상 또한 허상이 되고 말지 모른다. ‘지역’을 세우려면, 먼저 수도권이라는 일극 중심의 발전론을 극복해야 한다. 대안은 각 지역을 중심으로 틀을 짜고 발전해가는 다극화 발전론이다. 다극화 발전을 위해서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정부의 권한과 책임을 더 키워야 하겠다. 지자체의 권한과 책임을 높여, 지역이 지역에 맞는 산업과 고용을 스스로 추진하고, 지역의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 정책도 수행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교육의 양극화는 지역격차를 확대하는 주요 요인이다. 교육에서의 시장주의 접근은 격차를 확대하지만,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교육관료를 강화하는 것이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는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현실에서 최선의 교육은 시장과 국가의 중간, 즉 지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보다 더 광역화된 지역 간에 연합이 형성되고 지자체의 책임성이 높아지면 스스로의 책임 하에 지역 사정에 맞는 산업과 고용을 추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역의 공공재와 산업의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제도를 발전시키려는 유인이 마련된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서로에 대한 요구를 강화하면 대학-중등교육-지역을 연계·혼합하는 지역교육 거버넌스가 구축될 수 있다. 다극화된 발전을 추구하는 ‘지역’의 연합을 이루어낸다면, 최상의 복지국가를 향한 국가적 이상은 허상이 아닌 현실 앞으로 한발 다가올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인간다운 삶’을 달성하는 복지국가의 징검다리를 마련하지 않을까. 주현식 중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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