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이 젖은 땅 위에 하얗게 누웠습니다. 또 벚꽃이 피는 철입니다. 젖은 나무에서 우수수 흰 꽃잎 무리들이 비를 담은 바람결에 나부끼며 떨어집니다. 땅 위에 떨어진 꽃의 흰 살점을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갑니다. 밟혀서 상처 입은 꽃잎은 순교자 같습니다. 문득 시조 한 수가 떠오릅니다. 간밤에 부던 바람 만정도화(滿庭桃花) 다 지거다. 아이는 비를 들고 쓸으려 하는구나.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 하리오. 거세게 불던 지난 밤 바람에 뜰 가득하던 복사꽃이 다 떨어졌습니다. 뜰을 쓸던 시동 아이는 떨어진 꽃잎도 죄다 쓸어버리려 합니다. 늙은 주인은 아이더러 그대로 두라 합니다. 낙화도 꽃이라고요. 어쩌면 늙은 주인은 쓸려나가는 떨어진 꽃잎에 자기 모습이 겹쳐 보이는가 봅니다. 과연 늙음은 빗자루로 쓸어내 버릴 대상일까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왔습니다. 때마침 공연장인 문화센터가 유원지 근처에 위치한지라 봄나들이 인파로 흥성대는 분위기에 차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탓에 연극이 시작되고도 한참 후에야 입장했습니다. 무대장치로는 앙상한 나무 한그루가 전부인 무대에서 팔순(八旬)이 넘은 노배우들이 디디(블라디미르)와 조조(에스트라공)가 되어 연기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온 이들 노배우들은 고도가 누구인지도,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밑도 끝도 없는 이 기다림의 역할을 얼마나 여러 번 해 왔을런지요.    사실 극장에 들어서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구십을 바라보거나 팔십 중반을 넘어서는 저 배우들의 연기를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쓸쓸한 감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무대 위의 배우들에서 그들의 나이는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럭키 역(役)을 맡은 노(老)여배우는 하나에 700 단어가 넘는 빠른 대사를 더듬거림 없이 대본대로 완벽하게 말하며 춤도 춥니다. 디디와 조조의 딕테이션은 나무랄 데 없는 발음으로 전달되고, 두 시간이 넘는 공연 동안 걷고 뛰고 넘어지고 울고 웃는 동작에 지친 기색은 없습니다. 무대 위에는 노배우들이라기 보다 세월이 잘 빚어놓은 거장(巨匠)들이 있을 뿐입니다.   흔히들 지금은 ‘백세시대(百歲時代)’라고 합니다. 확실히 과거에 비해 평균 수명도 길어졌고 건강이나 신체 조건에서 삶의 질도 월등히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생겼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삶의 길이를 자신이 원하는 만큼 스스로 조절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내 스케줄에 계획하지 않은 때에 난데없는 일격(一擊)에 가격당해 인생이라는 무대로부터 퇴장당하는 것은 과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하여 우리보다 앞서 간 유명인들이 비유적으로 말했듯이 인생은 자기가 맡은 역에 충실해야 하는 연극이라고 합니다. 연극이 상연되는 도중에 자기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무대에서 내려올 수도 없고 역할이 마음에 든다고 자기 분량을 제 멋대로 늘일 수도 없습니다. 막이 내릴 때까지는 역할이 마음에 들어도,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제 배역에 성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꽃 피는 봄은 흔히 청춘에 비유되지요. 과연 생명력이 넘치고 화려하며 약동하는 봄은 가능성은 무한하게 열려있고 가슴 두근거리는 기대와 호기심이 가득한 청춘의 속성이지요. 눈과 얼음의 시간을 지나온 지 그리 오래지 않은데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한꺼번에 불꽃놀이처럼 피어나는 눈부신 꽃들과 새들의 즐거운 노래, 피부에 닿는 따스한 바람에 취해 봄이 기한 없이 언제까지나 허락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쓸쓸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가을이 다다음 문 뒤에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디디와 조조, 포조와 럭키로서의 역이 끝나고 배우들은 객석을 향해 인사하고 뒤돌아 무대를 내려갑니다. 치열했던 연기를 마무리하고 돌아서는 배우들의 뒷모습에 객석은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의 시 ‘낙화’ 1연)란 시 구절처럼 자신의 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한 후 무대를 내려가는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배우들이 갈채 속에서 무대를 내려갈 수 있는 것도 시간 속에서 갈고 닦아 마침내 연기로 일가견을 이룬 그들의 뒷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퇴적되어 세월이 됩니다. 오늘이 무대를 떠날 때의 나의 뒷모습을 만듭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내려갈 때 뒷모습이 부끄럽지 않기를 나는 때때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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