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苦海)라는 말은 ‘고통의 세계’라는 뜻으로, 괴로움이 끝없는 인간 세상을 이르는 말이고, 말세(末世)라는 것은 정치, 도덕, 풍속 따위가 쇠퇴하여 끝판이 다 된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이 삶을 영위(營爲)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이 발생하여 생(生)을 지탱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을 때 흔히 고해라는 말로 탄식하게 된다. 고통에는 신체에 아픔을 수반하는 병고, 생활경제가 곤궁하여 의식주에 어려움이 장기화하는 생활고(生活苦) 등은 인간 유체의 생명에 위해(危害)를 주는 일차적인 고통이다. 이것이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게 할 때 흔히들 고해라 하고, 현상세계의 여러 영역에서 규범을 지키지 못하고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여 바른 삶을 지탱할 수 없을 때 탄식하며 토설하는 서글픈 끝장 세계가 말세라 할 것이다.   고해와 말세에서는 인간이 인간을 의지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기에, 선량한 백성들은 고통이 없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극락과 천당이라는 유토피아를 염원하며 신앙에 의지하여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신라 사회에서 아미타신앙이 성행한 것도 아마 이런 연유에서가 아닐까.   선덕왕 2년(633)부터 문무왕 21년(681) 사이에 88차례의 전쟁으로 수많은 백성이 전장에서 죽임당하였고, 지진을 비롯한 14차례 발생한 천재지변, 15차에 걸친 축성 등으로 오랜 세월 불안(不安)과 고된 노무(勞務) 속에 살아야 했던 민중이기에 아미타 정토 신앙이 매우 성행했던 것은 삼국통일의 기쁨보다 현세를 고해로 여기고, 내세(來世)에서는 극락세계에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참담한 현실 탈피의 극락행 애원이었던 같다.   특히 신라 사회는 성골과 진골 등 엄격한 골품제 사회이고, 전제왕권의 사회였으므로, 왕족과 귀족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특권을 누렸으나 민중은 특권층만 옹호하는 편파적인 이데올로기(ideology)로 하급 생활을 면할 수 없었기에, 아미타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신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은 아미타 사상을 바탕으로 성립한 신앙이었으며, 특정 계층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신라 사회의 보편적인 삶의 가치관을 표방했기 때문에 널리 환영받은 사상이 되었다.   2년 지속되었던 ‘코로나19’는 보이지 않는 예도(銳刀)가 되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였는데, 이제 다시 의과대학 신입생 증원 문제로 전문의가 집단사직하여 위급한 환자의 생명을 도외시(度外視)하더니, 의과대학생들마저 공동휴학으로 학업을 포기(抛棄)했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는 세란(世亂)이다. 의대 교수들도 집단 사직의 수단적 통첩으로 정부에 대응을 취하는데, 정부는 해결을 위한 물리적 행동주의를 배격하고 법치를 앞세워 강경 대응을 하고 있으니, 세상이 고해인지 말세인지 팔질(八耋) 노령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끌고 당기는 줄 당기기 세태가 아닌 바에야, 고등교육을 받은 최상의 엘리뜨(elite) 집단이 문제해결을 위한 명쾌한 방법을 구안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선량(善良)이라 존경할 수 있으랴. 무고한 국민의 심장에 둔탁한 대못을 박는 듯 왜 이다지도 아프고 답답한가.   꽃다운 나이에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어 나라를 위해 산화한 학도병의 원혼이 원망할 것 같고, 독일 광산과 아프리카 고열의 사막에서 가난을 극복(克服)하려고 인고의 땀을 흘렸던 노무자의 눈물과 한숨이 원망의 질책이 되어 가냘프게 들리는 듯하다.   ‘인간의 삶이란 가을바람에 이곳저곳 떨어지는 나뭇잎’이라 하는데, 고해와 말세에서는 잎도 피지 못하고 나목(裸木)으로 조락(凋落)한다고 할 때, 오늘의 세태가 이 어찌 고해와 말세가 아니라 할 것인가. 총선을 앞둔 정당인의 난타성(亂打聲)까지 귀를 어지럽게 하니, 평등하고 평화로운 아미타신앙 세계의 목탁(木鐸) 소리는 언제 들을 수 있으려나.   창 앞에 비친 금오산 해목령(蟹目嶺)의 돌출한 해목에서 떨어지는 석게(石蟹)의 눈물이 속진(俗塵)에 묻은 때를 씻어 주려는 듯 오늘은 유난히도 번쩍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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