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는 율법(律法)이 있고, 모든 국가에는 헌법(憲法)이 존재한다. 어떤 집단이든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규범이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모든 규범은 원래 불문법(不文法)에 기원하지만, 사람들이 문자를 발명하면서 성경(聖經)이 만들어 지고, 불경(佛經)이 만들어 졌으며, 또한 성문법(成文法)이 작성된다.어느 경우든 법(法)이란 사람이 질서를 지키며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공동체의 약속이자 수단일 뿐, 그 법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게 비학자(非學者)인 나의 생각이다.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규범을 정한 종교에 왜 신학(神學)이 발현되었으며,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약속을 정한 성문법에 굳이 법학(法學)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법은 서로 지키기로 하자는 집단의 서약이기에 연구보다는 실천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법은 법전(法典) 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이 문맹(文盲)인 시절, 원래 불문법(不文法)이었던 율법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자, 법은 문자를 익힌 소수 인들의 전유물처럼 변질되고 신성시 되면서 어떤 권력의 수단이 된 것으로 보이는데, 대다수 사람들이 문맹을 탈출한 21세기 현재까지도 성직자들이나 법조인들은 율법이나 법이 마치 법전을 읽을 수 있는 자신들만의 것인 냥 특권의식을 가지는 사람들이 여전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나자렛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인 얘기를 보면, 비록 율법을 모르는 이교도 (異敎徒)일지라도 착한 행동을 하는 사람과, 교도이지만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님은 누가 더 보기 좋으실까? 라 하였고,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자신을 향해 엎디어 절을 하는 교도를 보고 합장하며 `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다만 불법을 전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니 그대가 바로 부처임을 아시라!` 하였으니, 성경이든 불경이든 헌법이든 간에 법은 어느 누구의 주관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주관으로 교리를 해석하거나 법리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종교적이며 위법적인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디지털 세계에 `0`과 `1`이외의 수가 없듯이 법과 진리는 `참`과 `거짓`의 구분이 원래대로 있을 뿐인데, 뉘라서 감히 유죄와 무죄를 자신의 주관으로 단정할 것이며, 뉘라서 진리를 권위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인가? 특정 성직자들이나 특정 법조인들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단편적 지식과 권위로, 모든 사람들을 원죄(原罪)를 가진 죄인으로 상정한 후, 그 죄를 자신의 재량 하에서 사하거나 벌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을 가짐으로써 스스로 신탁(神託)이 되거나 심지어 신(神)의 반열에 서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맹인(文盲人)이 거의 사라지고 지식과 정보가 공기처럼 유통되는 지금에 와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장 편협한 지식밖에 가지지 못한 그룹이 바로 그들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때문에 나는 특정한 전문지식에만 매몰되어 있는 특정 직업군이 가진 선민의식과 권위 따위는 구시대의 터부에 가까울 뿐, 진화하는 인류사회의 반동으로 보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성이 촉구되며, 대중들 역시 지식과 지성 그리고 권력의 평준화 시대를 살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임을 자각함으로써 스스로 가진 천부의 인권을 유린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권행사를 기피하거나 불의를 방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 생각한다.요즘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의 합리화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바로 `생각의 차이`인데, 생각의 차이가 진리를 바꾸거나 `참`과 `거짓`을 뒤바꿀 수 있다면, 모든 경전과 성문법은 괴문서에 다름 아닐 뿐, 거기에 하등의 권위나 신성(神聖)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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