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회가 제대로 된 사법체계를 갖추기 전 까지는, 가해자에게 가해지는 피해자의 사적인 복수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들의 개체수가 크게 증가하자 국가라는 거대 조직체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집단 내에서 사형(私刑)을 용인하게 되면 정의보다는 오로지 힘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짐승들의 생태계와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인류가 과연 문명을 가진 지성체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중세기 까지만 해도, 강자가 약자를 정복하고 지배하는데 있어 그다지 윤리의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 같은데,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도 그렇고, 개인 간에도 사적인 응징이 문화적으로 허용되는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유럽인들은 총과 칼로 원주민들을 거의 멸종시키고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초기 미국사회에서는 비겁하게 등을 쏘지만 않는다면, 개인 간의 이해 다툼이나 복수를 위한 결투에서 상대방을 사살하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보기에 따라 대단히 살벌하고 야만적인 문화가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도 나름의 사법체계를 가지지 않은 국가는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제는 모든 인류사회가 사적인 응징이나 보복대신 범죄적 악행을 저지른 자에 대해 공적인 형벌을 제도화함으로써 피해자에 대한 대리 보복을 합법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형법(刑法)이란 결국 어떤 범죄에 대한 공적인 보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인데, 그렇게도 복잡한 법리가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대체로 선(善)한 이들은, 보복보다 관용을 미덕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내가 못된 성격의 소유자인지는 몰라도 나는 절대로 그런 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철저한 보복과 응징이정의일 뿐, 감상적인 어설픈 관용이야말로 악을 배양하는 불의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법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 형법에서 가장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공소시효’라는 것인데, 가령 간악한 범죄자도 일정 기한만 잘 법망을 피해 숨어있으면 공소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공소시효의 취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서구사회에서 인륜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나라들이 엄연히 존재하며, 불경(佛經)에도 한 번 지은 업(業)을 피할 곳은 산도 아니요 물도 아니며 수 백 수 천생을 되풀이하며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 하지 않았는가? 부처님의 마음이 그다지 너그럽지 못한 탓일까?   원래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누구인들 사소한 죄조차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만, 본인이 악의 없이 의도하지 않은 중대한 실수, 즉 과실죄(過失罪)도 있을 것이며, 매우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고 기획된 사악한 범죄도 있기 마련이다. 개인이 개인에게 저지른 범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지만, 더구나 공적인 지위를 가진 자의 범죄행위는 너무도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기 때문에, 개인이 저지른 범죄와는 특히 구분되어야 옳지 않을까 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지만 않았다면, 그다지 유명한 정치인이 되지도 않았을 것 같은 구 영국 수상 ‘처질’은, 당시 벌 때처럼 영국을 무차별 공격해 오던 독일 폭격기 들을 막아낸 공군 조종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인류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큰 신세를 진적이 있을까!” 나는 ‘처칠’이 남긴 명언을 원용하여 갑자기 이런 말이 하고 싶어진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도 큰 피해를 입을 수가 있을까?” 칼에 의한 자상(刺傷)은 순간의 통증이지만, 세포 속에 스며든 어떤 독소는 당장에 큰 통증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쳐 사람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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