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학문에는 누구보다 해박한 남사고였지만 부모님이 평소 덕을 쌓지 않아 구천십장(九遷十葬)이라는 일화를 남기며 명당을 구해 9번이나 이장하였다. 그는 마지막에도 결국 부모님을 흉지에 모시게 되었고 본인 역시 사후에는 좋은 길지에 안장되지를 못했다.    남사고는 살아생전 자기의 무덤 자리를 직접 점지해 두었는데 후일 병이 들자 자식들을 불러 모아두고 내가 적덕을 쌓지 않고 명당을 구하다가 조상의 유골을 결국 흉지에다 묻었으니 이는 하늘이 내린 천벌이다. 내 자리는 큰 명당을 바라지 말고 적당한 자리를 잡아두었으니 이 애비의 명을 어기지 말고 내가 죽거든 그곳에다 묻도록 하여라 하면서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남사고가 죽고 후손들은 장례일 하루 전 그곳에다 관(棺)이 들어갈 수 있게 땅을 파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윤(尹)씨 집안으로 출가한 남사고의 딸 일행이 그곳이 명당 길지임을 알고는 밤중에 몰래 와 광중(壙中)에 물을 가득히 부어놓고 갔다. 다음날 아침 상여를 메고 장지로 와보니 광중(壙中)에는 물이 가득하고 아들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풍수에 대가이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묏자리를 잡아두었단 말인가? 자식 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물이든 자리에 모실 수 없다. 훗날 다른 곳에 좋은 땅을 잡아서 이장하기로 하고 근처 고갯마루 인근에다 체백을 모셨다.    현재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뒷산에 오르면 남사고의 묘로 전해 내려오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장례를 치르고 친정아버지의 묫자리 광 중에다 물을 부어 못쓰게 만든 딸은 훗날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에 찾아와 오빠들에게 이왕 못 쓰는 땅이라면 자기에게 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오빠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체 그냥 허락하였고 윤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은 그곳에다가 시아버지의 체백을 묻었다고 한다. 그런 후 명당을 차지한 윤씨 집안은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하여 많은 관료들이 배출되었다. 일제 치하에서도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조선인에게 관직을 거의 주지 않았지만 윤해구라는 후손이 군수의 벼슬까지 했다고 한다. 반면 남사고의 후손들은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은 훗날 후손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남(南)씨와 윤(尹)씨 집안은 사이가 벌어져 개울가 다리를 같이 건너기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다 한 개울에 가까이 붙여 두 다리가 놓아졌고 이것이 남(南)씨 다리, 윤(尹)씨 다리란 것이다. 경북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에 가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전해진다.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조선시대 대사간을 지낸 김극뉴의 묘소 역시 김극뉴의 부인이 친정아버지의 장사 전날 밤 묘소에다가 물을 부어 얻은 자리로 이곳은 호남의 8대 명당에 속하는 말명당(馬明堂)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외에도 과거 조선시대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조상에 대한 묘지 풍수가 발달함에 따라 ‘명당에 물 붓기’라 하여 이러한 일들이 전국각지에서 빈번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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